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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을 다시 보다......남명 조식선생을 만났습니다.

삼생아짐 2013. 7. 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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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혹은 그 달의 첫머리, 살아가는 형편 등등 사전적 의미는 고작 몇 개에 불과하지만 정작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고 받아들일 때에는 무한한 의미가 담긴 단어라 할 수 있지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아주 오랜 시간, 혹은 역사적 의미, 개인적인 상처, 인생무상, 변하지 않음, 주름살, 삶의 종착역, 남겨진 흔적,익숙함 등등 ,.....

 

제게 있어 '세월'이란 '욕심을 내려놓고 차분히 자신과 주변환경을 돌아보는 때'라는 의미일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어떤 장소에 가면 그 세월이 더욱 실감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경상도'나 '산청'이란 곳이 바로 그런 곳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도 저의 부모님 그리고 제 조상들의 뿌리가 경상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고, 그곳에서 학창시절 이전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또 '종가집 종손'이셨던 아버님이 저희 형제들이 아주 어릴적부터 항상 '고향'으로 돌아가야한다는 말씀을 늘 달고 사셔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저희 형제들끼리 꼭 고향에 내려보내셨던 아버님 덕분에 열두시간 이상 차를 갈아타고 내려가야했던 그 오랜 시간들이 그래서 제게 더욱 그런 의미로 남겨져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의 산청여행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곳입니다.

경남 산청 지리산 대포곶감마을의 조두규위원장님께서 함께 방문했던 안행부 주무관님과 우연히 한 집안이라는 걸 아시고, 뿌리를 보여주시겠다며 산천 사리마을 산천재에 있는 남명 조식 기념관으로 저희를 안내하셨습니다.

 

 

 

 

 

남명 조식은 굳이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조선시대 대학자지요.

 

 

두륜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보니

도화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어렸어라

아해야 무릉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 외웠을법한 그 유명한 시조의 저자이기도 하지요.

 

 

 

 

들(入)고 남(出)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법도를 따라서인지 혹은 문을 들어서면 속세의 사사로운 마음을 모두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인지 들어가는 문과 나가는 문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놓았습니다.

 

 

이 문을 들어서고 나면 저도 마음 수양을 하고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의 깊이에 조금이나마 다가설 듯한 기대감(?)을 갖게되고......

 

 

 

 

하여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서원으로 들어섰습니다.

 

 

 

 

 

좌편에 보이는 남명 조식 선생의 동상과 학문비들

 

 

 

 

 

군 의회 의원까지 지내셨다는 남명 조식 선생의 후손이자 경상남도 문화관광 해설사이신 조종명님께서 남명 조식선생의 학문의 세계와 그 제자들이 남긴 업적, 그리고 그 당시의 정치와 사회적 배경 등에 관해 자세히 안내해주셨습니다.

 

 

 

 

 

남명 조식은 16세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일어난 기묘사화(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죽거나 귀양감)를 보고 충격을 받아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머물며 학문을 정진하여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었다고 합니다.

 

 

 

 

-------그의 학문의 깊이를 높게 산 임금이 벼슬을 내렸으나 거절하는 상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임금의 잘못이며 벼슬아치들 또한 당파싸움에 매달릴 뿐 나라를 돌보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어린 명종의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황후와 그 친인척의 잘못을 들어

 

 

"태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밖의 소식과 단절된 깊은 궁궐속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先王)의 나이어린 고아일 뿐이니(중략) 헛된 이름을 팔아 임금의 벼슬을 도적질해서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터럭만큼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직언을 하였으며

 

 

왕위에 오르고 20년 동안 어머니의 수렴청정을 받던 명종이 문정왕후가 죽은 뒤 강직한 선비 조식을 잊을 수 없어서 만나기를 청했고, 임금의 거듭된 부름에 마지못해 조식이 한양에 오자 먼발치에서라도 조식의 모습을 보기 위해 구름 같은 인파가 한강 나루터에 모여들었지만

 

 

조식은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니 백성을 으뜸으로 여기라'는 간언을 하고는 열하루 만에 제자들이 기다리는 지리산 밑 산천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상 김교빈교수님 저서 인용, 동양철학자, 호서대 문화기획학과 교수)-------

 

 


 

 

남명 조식 선생은 평생 재야에 묻혀 살면서도 자신에게 엄격해서 성성자(惺惺子)라고 스스로 이름을 지은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움직일때마다 들리는 그 소리로 자신의 의식을 깨우는 수행을 생활화하고 마음속에 돋아나는 그릇된 생각을 잘라내기 위해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일본의 침략을 예견한듯 제자들에게 왜인이 침범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시험하고 병법을 가르쳐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일어난 임진왜란때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한 정인홍, 김면 등 약 57명의 의병장이 배출되어 왜구와 싸워 나라를 지켰고,

 

이는 그가 학문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노장사상, 병법, 지리, 천문, 역법 등 다양한 학문태도와 사회적 실천에서 비롯된 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두가지 이유로 인해 남명 조식을 일명 칼을 찬 선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곧이어 들른 곳은 덕천서원(산천재)입니다.

 

 

 

 

 

서원입구에 서있는 이끼를 품은 거의 오백년된 은행나무가 세월을 말해줍니다.

 

 

 

 

 

 

얼마나 그 세월이 긴지 나무기둥 사이에 또다른 나무를 품고도 당당한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벚나무와 은행나무 씨앗이 나무 껍질 사이에 떨어져 새로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선생의 글 읽는 소리와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낭낭한 음성이 들려오는듯 합니다.

 

 

 

 

 

조선시대 경상좌우도로 나뉘어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문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 선생

 

가난을 몸소 체험하고, 날카로운 비판 정신으로 목숨을 잃을 위기도 여러번,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경의(敬義)를 중시하며, 실천적 삶을 살아간 남명 조식 선생의 흔적을 쫒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반듯한 글씨체를 접하면서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오랫동안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시고, 혼자서 바둑을 두시던 아버지의 생전이 모습이 떠오르고, 국문학을 전공한 제가 농촌으로 시집와 버리고 학문에서 떠나버리자 실망감을 내색않고, 오랜 세월 지켜오시던 집안의 문집과 그림들을 더 많은 사람이 보게 해야 한다며 도산서원에 모두 기증해 버리시고 훗날 조상들의 모습이 그리우면 그곳에 가서 보라고 당부하시던 모습, 돌아가시면서도 도산서원 원장을 지내신 고조부 산소아래 화장해서 뿌려달라시던 유언을 남기고 결국 그 밑에 가서 묻히신 아버님.......

 

한때는 조상들을 섬기고 늘 의와 경을 말씀하시는 그 모습이 현대와 맞지 않다고 끊임없이 반발하고 비웃기까지 했던 지난날의 제 어리석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제가 나이들긴 들었나봅니다.

 

 

 

 

 

 

그 두륜산 양단수가 바로 저 앞에 있다며 위원장님 손짓하시는데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혹은 빨치산의 아픔이 남아있는 곳으로만 알았던 산청을 다시 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어린시절 많이 보았던, 그러나 기억에서 잊어버렸던 석류꽃을 다시 보면서 산청을 떠나오는 길, '산청으로 떠나는 역사여행'을 테마로 수학여행단을 유치하거나 체험을 기획해도 좋겠다고 했더니 위원장님, 생각중이라 하시네요.

 

'선비문화제'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어서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유학과 철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찾아오시고 계시다며 자랑스럽게 고장을 말씀하시는 위원장님을 뵈면서 자신의 뿌리를 지키는 건 후손들의 몫이로구나...라는 생각이 절실합니다.

 

 

 

 

 

 

올 가을쯤, 아버님이 그렇게나 말씀하시던 도산서원에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한번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니까요.

 

아주 어렸을적에 가보고 한번도 못 가본 곳인데, 이제 불혹(不惑)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지금, 제게 어떻게 다가올지 사뭇 궁금합니다.

 

어렸을적 자주 배웠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그 의미를 이제서야 잘 알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