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야...
지금은 세시 반,
문득 네 생각이 나서 잠을 깨었다.
그러고보니 네가 며칠동안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는 생각이 나네...
그리고 기숙사에 들어가기 싫어하던 네 모습도 생각나고,
엄마가 뽀뽀해달라고 하자 냉큼 하려다가 아버지가 "다 큰 놈이..." 하고 뭐라 그러자
기냥 휙 들어가버렸던 생각도 나고...
엄마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할까.....
엄마가 하는 말이 네겐 늘 잔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아서 가슴아프다.
그래서 너한테 말하는 것도 어떨 땐 조심스러울 때가 있고.
어쩌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하고 살아와야 했던 네 아버지가 늘 하는 말씀처럼
'알아서 해'
그 한마디가 진리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고
외할아버지의 그 끝없는 간섭과 엄한 잔소리가 어쩌면 엄마한테도 배여서 너한테 그렇게 하는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
그래서 엄마도 너희를 특히 너를 대할 땐 많은 생각과 갈등이 든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항상 너를 앞에 두면 그렇게 엄마 맘이 복잡하다.
오늘은...그래 오늘은 너를 낳았을 때 이야기를 해볼께.
네가 처음 태어났을 때가 생각난다.
누나를 낳았을때, 큰아빠보다 아빠랑 엄마가 먼저 결혼하고, 딸인 누나를 낳자 다들 좋아했다.
큰아빠네보다 먼저 아들을 낳지 않아서 적어도 장손은 큰 댁에서 나오니깐 순서가 그리 잘못된 건 아니라고.
그러다가 성재형이 태어나고, 소연이가 태어나고, 네가 태어났을 때 집안의 기쁨은 두배였다.
특히 아빠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어쩜 딸이라고 서운해했을런지도 모르는데, 그 내색을 안하고 있다가, 비로소 아들인 너를 낳았을 때,
누나 때보다 두 배로 더 기뻐하던 네모습,
아빠가 처음 한 말이 목욕탕에 같이 가면 등 밀어줄 사람이 생겼다고...
그리고 아빠가 죽으면 제사 지낼 줄 사람이 생겼다고.
너는 그렇게 아빠의 희망이고 기둥이고 보람으로 태어났단다.
옛날 집 알지??
엄마, 아빠가 처음 농사지으러 들어왔을때 살던 옛날 집,
보일러도 안 되고,
나무 해서 아궁이에 불 때고,
우물물을 길어 가마솥에 채워넣어야 했던 그 집에서 살 때,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동네주민들과 갈등이 생겼던 집주인이 우리더러 나가달라더구나.
집없는 설움이라고...
갑자기 살던 곳을 내놓고 나가라하니 얼마나 막막하던지.
시골은 도시처럼 옮겨갈 집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화가 나서 빚을 얻어 집을 지었지.
그 집을 지으면서도 설움이 많았단다.
시골의 텃세가 얼마나 심하던지...
일자리가 많지 않은 시골사람들은 농사일을 하지 않을때면 품을 팔아 먹고 사니깐
우리 집을 지을 때 다들 품팔이를 원했지.
근데 우리가 직접 지으니깐 그게 서운해서 아버지의 뺨을 후려친 사람도 있었단다.
자기가 공사를 맡아 하면 큰 돈을 남겨먹을 수 있는데,
빚을 내어 집을 짓던 우리였으니까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직접 지으니 심술도 부리고,
일꾼 맞춰 놓았는데 술먹고 일도 안나와서 일 펑크내고,
엉망으로 해놓고...
정말 속상하고 원망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힘들게 힘들게 집을 지어놓고,
정원을 만들다가 그 돌에 아빠의 발이 찧어 엄지 발톱도 빠지고, 피멍도 들었단다.
그무렵 네가 태어났어.
아빠는 사람들에게 양말을 벗어 그 빠진 발톱을 보여주며, 너를 만드느라 그랬다고 사람들에게 자랑스레 말하곤 했지.
그래서 아빠와 너를 만나는 사람들은 마구 웃으면서도 네가 아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잘 알았단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유난히 잘 보채는 성격의 너인지라,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엄마, 아빠 품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아서 아빠가 술먹는 자리거나 밥 먹는 자리에서 너를 안고 술을 마시면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아빠 입에 안주를 넣어주곤 했다.
그래도 아빠는 좋아했었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게 눈에 보이는지...다들 그랬단다.
너네 아빠 혼자 아들 낳았다고.
엄마는...그래. 엄마는 사실 너를 낳을 때에도, 누나를 낳을 때에도, 그리고 민재를 낳을 때에도 늘 마음에 갈등이 많았다.
독선적이고, 소리 잘 지르는 아빠와 사는 것도 힘들었고, 농촌에서 사는 것도 힘들었고, 결혼전의 엄마 생활보다 여러모로 다른 결혼후의 생활도 힘들어서 늘 마음에 갈등이 많았다.
그래서 누나를 낳고, 한동안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고, 그러다 네가 생겨 너를 낳았지만, 여전히 생활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먹고 살기 위해 과외를 하고, 농사일이 끝난 겨울철에는 홍천에 있는 여러 학교에 나가면서 너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렇게 일해야 했다.
학교에 나가지 않을 때에도 어린 수향이에게 너를 맡기고 밭으로 논으로 나가 일하면서, 누나가 학교에 가면 맨발로 엄마 아빠를 쫓아다니며 울던 네 모습이 생각난다.
긴 오이 밭고랑에서 엄마, 아빠를 쫓아다니다 땡볕아래, 밭고랑을 베고 쓰러져 잠든 네 모습도 생각나고...
그래서 농촌에서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바로 너 때문에 엄마가 이를 악물었다.
내 자식에게는 농사일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가난과 빚쟁이로 사는 생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내 자식에게만은 이런 고생스러운 생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아빠 원망도 많이 했다.
아빠도 고향이라고 들어왔지만, 그리고 함께 잘살아보려고 농민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며 들어왔건만, 사람들 텃세도 심하고, 심술도 심하고, 모두들 아빠의 실패만 기대하고, 손가락질 해서 그걸 견뎌내느라 아빠 마음속으로도 갈등이 많았단다.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술도 많이 마시고, 또 혼자서도 힘들어 그걸 이겨내려고 술마시고, 그런 아빠를 보며 엄마도 절망하고, 그랬단다.
시골이 좋다고 했지??
물론 좋지.
시골 사람들이 순박하고 정이 많다고 했지?
물론 그런 사람들도 많지.
하지만 남에게 비수를 들이대는줄도 모르고, 무심코 한 행동과 말들이 상처주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줄도 모르고 저지르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 줄 아니??
시골 사람들은 단순하다고 하지?
그게 왜 그런지 아니??
엄마는 도대체 사람들이 왜 그럴까 했는데, 그게 바로 정보와 배움과 인식의 차이였단다.
시골에서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마치 진실인양 와전되어 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다반사란다.
물론 많이 배웠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착한건 아니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겐 일종의 열등의식이 있단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 본 사람보다는 시골에서 나서 자라고 시골에서 늙어가는 사람들에겐 도시생활을 하는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증오가 있단다. 그리고 부러움도 있고...
그래서 그 부러움과 열등감을 '무시'라고 하는 말로 대치하지.
농담삼아 '도시촌놈'이라고 하곤 하는데...
도시 사람들의 예의바름이나 셈의 정확함이 오히려 시골사람들에겐 비웃음 거리가 되기도 한단다.
이기적이고 목소리 큰 몇 몇 사람들,
남을 칭찬하기 보다는 헐뜯고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받아들여지는 때도 많단다.
게다가 몇 몇 사람들에겐 남이 잘 되는 것보담은 안되고 망가지는 것을 더 즐기는 심리도 있단다.
도시든 시골이든 그런 사람들의 심리가 참 힘들고 안타까운게 살아오면서 엄마가 느낀 서글픔이란다.
사람들은 똑같이 농사일을 하면서도 깨끗한 옷을 입고 얼굴이 흰 사람들을 손가락질 한단다.
지금은 다들 좋은 집을 짓고, 옷도 잘 입고, 좋은 차도 타고 다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론 늘 '다르다'라는 생각때문에 거리를 둔단다.
(물론 도시 사람들도 얼굴 까맣게 그을리고, 흙 묻은 작업복을 입은 농민들을 무지한 농사꾼이라고 반대로 비웃는 적도 많긴 하단다)
지금은 농촌사람들도 학교공부가 아닌, 여러 과정을 통해 공부도 많이하고,의식도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몇 몇 편견과 장벽은 여전히 있단다.
그 장벽을 깨려 노력해 온 세월이 엄마, 아빠의 삶의 과정이었고......
고향에 살면서도 늘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빠의 외로움이란다.
그래서 아빠는 너를 내보내길 원했던거야.
너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라고...
그 옛날, 할아버지를 잃고, 혼자되신 할머니가 아빠와 큰 아빠를 데리고 농촌생활을 버리고,
도시로 나가서 여러 일을 전전하며 공부시킨 것처럼, 아버지도 너를 내보내서 그렇게 공부시키길 원하신거야.
너는 가족과 친구들과 집을 떠나서 외롭다고 느끼지??
하지만 고향에서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사는 아빠만큼이나 외롭겠니??
자랄 때, 고향에 다니러 왔는데 냉해를 입어 논 한가운데에서 빈 쭉정이 나락을 쌓아놓고 불지르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면서, 자기는 고향으로 돌아와 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겠다고, 그렇게 맹세를 하고, 할머니의 그 힘든 뒷바라지도 헛수고로 돌린 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학교에서 잡아준 직장도 마다하고, 양가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농촌에서 살아온 긴 세월들...
그래 엄마, 아빠가 시골에서 살아온 세월들은 사는 게 아니었단다. 한마디로 살아남는 거였다.
너또한 고향이라고 이곳을 그리워하지??
사람들로 북적대고, 차와 소음과 그 온갖 것들로 화려한 도시가 삭막하고, 그러니??
이담에 나이들면 다시 고향으로 들어와 살겠다고 했지??
그치만 영재야...
네가 지금 보아야 할 것은 도시의 부정적인 면들이 아니라 '기회'란다.
이곳의 아이들이 막연히 도시를 동경하는 것처럼 도시생활또한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아마 너도 지금쯤은 알고 있을거야.
너또한 그곳으로 나가기 전엔 도시생활을 동경했을 터이고.
아빠가 자라난 고향이 좋을 거라고, 따뜻할 거라고, 농촌생활이 편할거라고 막연히 꿈꾸었던 것처럼...
엄마는 너에게 고향의 부정적인 면을 말하려는 게 아니야.
농촌이든 도시든 '외롭긴'마찬가지란다.
도시사람들 또한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약삭빠르고,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칼을 들이댈 야비한 사람들도 많고,......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라는 걸 이젠 엄마도 알아.
엄마또한 이곳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살았어도 여전히 힘들고 외롭고 또 그랬을거야.
중요한 건 '자신'이란다.
어떤 곳에 살든, 어떠한 사람들과 살든, '자기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이루려 노력하고, 자기의 가치를 세우는 일은 사는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단다.
네가 지금 가장 잘 할 수있는 일이 무언가 생각해보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너의 인생에서 네게 가장 중요한게 무엇인가도 생각해봐.
그리고 네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있을지도 상상해봐,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도.
네가 살아가야 할 길은 길고도 먼 것 같지만, 엄마 나이쯤 되니까 이제 시간은 유한하다는 걸 비로소 실감한다.
순간순간의 유혹에 휩쓸려 살아가기 쉬운게 사람인데, 엄마또한 그런 나약한 사람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데, 네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그래,,,또다시 네게 잔소리로 느껴진다면 엄마도 어쩔 수 없단다. 엄마 또한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으면서도 늘 후회하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또 누군가를 원망하고, 속을 끓이고, 그렇게 살고 있으니깐.
하지만, 영재야.
아빠가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엄마도 이젠 너를 믿고 싶다.
엄마는 아빠한테 늘 원망하곤 했지.
엄마가 가르치는 대로 네가 조금만 더 따라오면 넌 참 잘할 수 있을 텐데, 아빠가 너무 내버려두고 너에게만 맡긴다고.
어제도 그 문제로 다퉜단다. 민재가 시험을 앞두고 자꾸 딴짓해서 엄마가 뭐라 그랬더니 엄마를 부르더구나.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땐 잘하는데 왜 중고등학교에 가면 그 모양인줄 아냐고.
그게 엄마 탓이란다.
엄마가 너무 모든걸 다 해주려고 해서 그렇단다. 과잉보호하는 거라고.
그치만 엄마 생각은 다르다.
초등학교 때처럼 엄마가 가르치는 대로 엄마를 따라와 준다면 지금보다 그 이상을 이룰 수 있는데,
그리고 일부러 돈 들여 과외하거나 학원다니지 않아도 엄마가 그 교사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 시간을 갖지 않아서, 너희들이 받아들여 주지 않아서 못하는 거라 했더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엄마랑 할 말 없다고 하더라.
그런거니?
네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데 엄마가 너무 과잉보호하려 한거니??
그래,차라리 그랬음 좋겠다.
너는 남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기본이 있는데, 다만 성실성이 좀 부족했던 거 아닌가하고...
엄마가 그 성실성과 노력한 보람의 결과를 좀 더 보여주려 했던게 과잉보호가 되어버렸다면...엄마도 안할게.
하지만, 한가지,
엄마는 너의 능력을 믿는다.
네가 하고자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해내는 것처럼, 엄마는 네가 마음의 중심을 잡고, 네 목표를 정하고, 외로움을 떨쳐버리고, 큰사람이 되기를 원해.
아이들이 걷기 위해서 천만번 넘어진다고 하지??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걸을 수 없는 것처럼, 두려워하지말고, 막막해 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네 삶은 네거니깐.
네 삶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너란다.
사랑해, 영재야.
엄마의 이 글 조차 너에게 또하나의 잔소리가 되어버린다면...그조차도 안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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