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국외)/이탈리아

포로로마노(유럽여행기7)

삼생아짐 2015. 1. 2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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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광장에서 마뉴엘레 기념관을 끼고 우측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캄피톨리오 언덕이고, 

포로로마노를 사이에 두고 쭈욱~~더 올라가면 팔라티노 언덕이 나온다.

 

 

 

 

캄피톨리오(Campidoglio)는 로마의 일곱 언덕중 하나로 '카피톨리노'(Capitolino)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으로,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었던 유피테르와 유노의 신전과 로마 시청이 위치해 있다고 한다.

 

 

 

캄피톨리오 언덕을 향해 가는 길...

길가의 거리에 스프레이 화가(?)인 듯한 여자분이 앉아있다. 

 

이 여자분...한국인인 듯한 느낌...

 

근데, 아는 체 할 수가 없었다.

유학생인가 싶기도 하고...

하이2

 

스프레이로 로마의 유적을 그려서(뿜어서..ㅋ) 판매하고 있다.

포로로마로 가는 곳말고도 콜로세움 가는 곳에도 그리고 로마시내 유적지 곳곳에 이런 분들이 많이 있다.

색다른 예술의 형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자체는 꽤나 그럴싸하다.

 

 

 

 

알고 있는가?

커피한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이탈리아라는거.

이탈리아에는 약 40개의 세계 문화유산이 있다.

그리고 이 포로로마노는 그 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돌 하나하나조차 모두 역사가 있다고 한다.

하긴 로마시내 어느곳에도 문화유적 아닌 곳이 있던가...

로마는 이 유적지 발굴만으로도 아직도 백년은 더 먹고 살 수가 있다고 한다.

 

 

 

 

로마시대 (BC 3세기)에 투리아눔(Tulliamum)이라 불리웠던 마메르틴(Mamertin Prison) 감옥

 

 

 

 

초기에는 지하저수조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대중의 관심이 높은 죄수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바뀌어 사도 바울과 초대 교황인 성베드로가 순교 당하기 전 갇혔던 곳으로 

 

이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지진이 나서 감옥의 문이 열려도 성베드로와 바울이 도망을 가지 않자 감동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 감옥의 샘물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지금도 감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우리는 또 통과...

흥5

마메르틴(Mamertin Prison) 감옥 맞은편에는 산타루치나 마르티나 성당이 있다.

 

성 마르티나가 순교한 장소로 625년에 처음 교회가 세워졌으며 현재의 모습은 16세기에 재건축된 것이라 한다. 

기둥과 부조, 문장 장식들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형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포로로마노( Foro Romano)가는 길

자그마치 2천년전 고대로마의 중심이었던 곳.

굿잡

 

 포로(Foro)는 공공광장이라는 뜻이며, 영어 Forum의 어원이 된다.

오케이3

 

포로로마노는 고대 로마시민 생활의 중심지로 1,000년동안 정치, 종교, 상업 등 시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밀집되어 있던 로마의 심장부 역할을 하던 지역이다. 

   

 

 

 

길 양쪽으로 조금씩 드러나는 포로로마노의 흔적들, 

그 오랜 옛날에 이렇게 정교한 벽돌들을 만들어 집을 지었다니...

참 그들의 재주는 놀랍기만 하다.

 

 

 

캄피톨리오 언덕에서 포로로마노로 내려가는 이 길은 

게모니아 계단이라 불리우는데, 투리아눔에 갇혀있던 고대 로마의 중죄인들이 처형을 당하기 위해 끌려가던 길로 일명 슬픔의 계단(Stairs of Mourning)이라고도 불리웠다고 한다.

 

 

 

이 돔 양식의 성당은 원로운 청사가 놓여있던 자리에 세워진 성당...

이름은 잘 모르겠다.

 

 

 

 

포로로마노는 로마초창기에는 6개의 언덕으로 둘러싸인 습지대였고, 주변은 묘지였단다. 

 

하지만 모든 언덕으로 연결하기 쉽다는 이유로 시가지가 들어서게 되었고, 575년 5대 왕인 타르쿠니우스가 배수로를 만들어 이 분지를 사용할 수 있게 하면서 집회의 장소가 되고 

 

카이사르의 포럼이나 아드리아누스의 포로, 투라야누스의 포럼 등 많은 포럼과 신전, 바실리카(공회당), 기념비 등의 건축물등이 들어서게 되었단다. 

 

 

 

그러나 제정 로마시대가 되면서 정치활동의 중심이 황제의 궁전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으로 옮겨졌고 283년 대화재로 많은 건물들이 불타고 로마 멸망 후에는 일부 건물들만 사용되고 방치되다가 주위 언덕에서 흘러나온 토사나 쓰레기에 묻혀 채석장으로 변해버렸고, 야만족들에 의해 약탈되기도 하다가 캄피톨리오 언덕도 황폐해지며 나중에 홍수가 나서 완전히 흙에 묻혀지게 되어 버렸다. 

슬퍼2

 

중세때에는 이곳에 임시 가옥을 짓기도 하였으나 무솔리니 시대인 19세기에 비로소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찻길 가까운 곳에는 최근까지도 발굴 작업 중이라 한다. 

 

  

포로로마노는 팔라티노언덕이나 캄피톨리오광장 등 여러 곳에서 볼 수가 있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캄피톨리오 언덕 아래, 포로로마노의 한 곳 중 쿠리아루리아라는 곳으로 원로원의 의사당에 해당하는 건물의 옆 테라스였다. 

 

이 벼랑은 타르페아(Tarpea)라는 어느 소녀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타르페아는 조국을 배반하고 사비니에게 성채를 넘겨주었는데, 훗날 그에 대한 죗값으로 벼랑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 뒤로 타르페아 벼랑은 배반자들의 처형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좀 무시무시한 장소넹...

안돼

 

 

쿠리아는 가이우스유리우스에 의해서 기공되어 옥타비아누스가 29년에 완성시킨 것을 황제 디오크레티아누가 재건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금세기에 들어 더 복원한 것으로 공화제 시대에서 제정 전기에 걸쳐 로마의 정치적 중추로서 일종의 국회 의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성당 부분을 복원한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입법 자문기관으로 정치와 외교를 지도했다. 

로마 공회장 유적지 안에서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기원전 670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마지막으로 손질을 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로원 제도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오래 유지되었던 정치 형태였다. 

이 원로원에서 카이사르가 아들처럼 아꼈던 브루투스에게 암살되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세익스피어에 의해 창작된 말이라고...

오케이3

 

(로마인 이야기에 의하면 부르투스는 그의 어머니가 카이사르와 어려서부터 연인관계였고, 카이사르의 사생아라는 말을 들어왔기에 그다지 카이사르를 좋아하지 않았다고...그러나 카이사르는 유난히 부르투스를 아꼈다고 한다.

 

그러면 뭐하나...결국 양아들처럼 아끼던 그의 손에 죽음을 맞고 말았으니...

슬퍼3

 

 

 

 

원로원 건물 앞의 광장은 '코미티움(Comitium)'이라 하여 시민들이 모여 집정관을 선출하던 곳이다.

즉 로마공화정 시대, 민회가 열렸던 집회 장소로서 로마시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역으로 투표, 재판, 평의회 등이 열렸던 곳으로 이 코미티움을 중심으로 원로원 집회장, 법정이자 집행부가 있었던 줄리아 바실리카, 그리고 주요 신전들이 들어섰다.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

커피한잔

 

이렇게 탁 트인 광장에서 시민들을 청중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재판을 하던 장면

의회 민주주의의 시초는 시민혁명후 영국에서 입헌군주제와 함께 모습을 갖췄다고 하지만, 어찌 보면 자유로운 토론과 정치, 철학 등은 이 로마의 광장에서 태동한 것이 아니었을까...삼생아짐의 추론..ㅋ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사용하는 '아고라'라는 단어도 바로 고대 그리스의 시민으로 분류되던 자유민 즉 남성들이 국방의 의무를 위해 모이거나 의회의 통치 발언을 듣던 장소이고, 후기에는 상인들이 상품을 팔기 위한 노점, 상점 등을 운영하는 시장의 기능을 해 왔기에 같은 맥락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나...

요염

 

 

여기엔 아직도 시민들에게 열변을 토하던 정치인들의 연단이 있다고 한다. 

라피스 니제르(블랙 스톤)'Lapis Niger'라는 이 연단은 로물루스의 묘지 덮개였다고 한다는데 신사의 비문으로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그 시대에 살지 않아서 나도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음..ㅠㅠ

슬퍼2

 

 

 

 
캄피톨리아 언덕에서 포로로마노의 코미티움으로 내려가는 곳에 위치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개선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10년 통치를 치하하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와 제타의 파르티아, 아라비아, 아시리아 등지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과 시민들이 203년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 새겨진 신들의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에 전 유럽에 전해졌다.

 

 

폭 25*7.5미터 높이 23미터의 개선문으로 이곳에서 부터 바로 포로로마노가 시작된다. 반대쪽에선 티투스의 개선문에서 시작되고..

 

로마의 개선문중 가장 오래되었다는데 포로로마노에 내려가서 직접 보지 못했으므로 이또한 통과..

흥4
 

 

 

세베루스의 개선문은 포로로마노에서 가장먼저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 

1800년정도 된 조형물로 폭군으로 유명한 카라칼라와 그 아버지, 동생을 기념하는 조각이 있었는데 카라칼라가 권력다툼끝에 어머니인 율리아 앞에서 동생인 제타를 죽이고 모든 기념물, 조각상에서 그 이름을 빼버렸다고 한다.

권력이란...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피를 나눈 친동생도 조카도 심지어는 아버지 마저도 죽이는 자리...

그렇게 권좌위에 앉았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이나 권력은 유한한것,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에는 지난 날 저지른 일들을 후회하며 눈을 감을듯...

아파

사실인지 아닌지 이 두 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영원히 물려주고자 했던 세베루스 황제조차 눈을 감을 때 자신은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그 모든 것이 또한 헛되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개선문 위쪽 글씨는 파르티아의 전투, 그리고 아라비아의 전투 때 승리한 것을 담고 있다고 한다.
 
캄피톨리오 광장에 있는 세나토리오 궁 뒤쪽 좌우에 설치된 테라스나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면 더 잘 볼 수 있는데 이날 우리가 올랐던 곳은 바로 쿠리아 바로 옆의 테라스였기에 이 개선문이 이렇게 보였다. 
위의 사진은 예전에 이탈리아에 잠시 머물렀던 딸래미가 보내준 것.no
 



 
즉 우리는 코끼리의 다리만 본 것부르르2 이 아니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의 옆다리를 무지하게 자세히 봤다는 것...ㅋ하하
 
다리에 새겨졌던 조각들(부조)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데, 
분명 사람의 형체였음이 분명한데 목이 없고 또 한사람도 거의 뭉개졌다. 

 

 

 

이렇게 점차 지워지고 있다는데...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모두 지워질듯한 아쉬움이 남는다.열공
그중에는 폭군으로 유명한 카라칼라의 인위적인 동생의 흔적지우기도 포함된다.
 
어떠한 자리건, 그 자리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이 한 만큼, 노력한 만큼 그 가치가 생기는 것이고, 그또한 후세에 길이 오르내리리니...
권력을 가진 자,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영원할 것이며, 최고의 것이라 자만하지 말라.
역사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아무리 대중의 눈을 속이고, 역사를 가리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명명백백 밝혀지리니...문자
 

 

콩코르디아신전 (tempio dellaConcordia)

 

콩코드는 로마의 여신으로 계약,이해,조화를 상징하며 그리스 신하의 하모니아(Hamonia)와 같은 개념의 신으로 평화의 여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신전은 기원전 367년의 마르쿠스 카밀루스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나 여러차례 무너졌다가 기원후 7-10년에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복구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509년 로마인들은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 국가로 재출발했으나 겉으로만 집정관, 원로원, 민회의 삼각체제를 이루었을 뿐, 귀족 출신의 집정관과 원로원이 한통속이어서 평민 중심의 민회는 여전히 소외되었다. 귀족층의 전횡에 반발한 평민층은 기원전 494년 몬테사크로(성스러운 산)에서 농성하며 파업을 전개했고 병역 소집에 불응했다. 이른바 시민불복종 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겠다.

 

외적과의 전쟁이 끊임없던 상황에서 평민들의 병역거부는 귀족층을 압박해 평민 계급의 권익수호를 임무로 하는 '호민관'이 창설되었고 백년쯤 후, 북방 켈트족이 쳐들어와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때 20년동안 로마인들은 파괴된 도시를 복구하느라 정신없었으나 어느정도 복구가 끝나자 그동안 잠복했던 계급간의 갈등이 재연, 평민계급의 힘이 커지고 시민의식이 높아져 기존 권력층에 대한 불신과 정치개혁 요구가 받아들여져 기원전 367년에 '리키니우스법' 이 성립했다.

 

이 법은 국가 조직의 전면 개방, 즉 완전한 자유경선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원로원이 임명해온 집정관도 시민들의 선택에 맡기게 되었고, 귀족계급또한 계급 장벽을 허무는데 동참하게 되어 사회적 개방과 통합은 천년 왕국을 지탱하는 바탕이 되었고, 콩코르디아 신전은 바로 이 위업을 기념하는 금자탑으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하얀 기둥 세개 옆 부분의 작은 기둥들로 이루어진 곳이고 현재는 기초부분만 남아있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참으로 위대한 신전이라 할 수 있겠다.

굿잡

 

베스파시아노신전 (Tempio di Vespasiano)

황제 드미티아누스에 의해 건설된 신전으로 현재는 3개의 코린트식 기둥만 남아있다. 

 

세나토리오궁(Palazzo Senatorio)과 타부라리움(Tabularium)

 

오른쪽 뒤통수를 보이는 건물은 바로 캄피톨리오 광장에 지어진 세나토리오궁의 뒷모습이다. 

 

현재 로마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세나토리오궁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고 계단실 앞쪽의 분수는 테베르강과 나일강의 신, 그리고 로마의 여신인 미네르바(Minerva / 지혜와 武勇의 여신)를 상징화한 것이다.종탑은 이탈리아 건축가 마르티노 론기 일 베치오(Martino Longhi il vecchio / 1534~1591)에 의해 디자인되었고, 1578~1582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세나토리오-宮의 정면은 이탈리아 건축가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와 지롤라모 라이날디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이 건물은 고대 로마시대의 공문보관소(archives)가 한때 있었던 타불라리움 유적위에 세워졌다. 타불라리움에 있었던 페페리노-동(Peperino)은 궁의 좌측면과 종탑의 한쪽 부분에 재사용되었다고 한다.

 

타불라리움은 국가 공무 서관으로 기원전 78년에 독재관 루키우스코르네리우스 술라에 의해 건립되었고

,캄피톨리오 언덕위에 세워졌다. 

 

 

포카스( Flavius Phocas Augustus)황제 기념원주

가운데 길다란 기둥 하나.

 

포카스 황제는 602년 전임 황제 마우리키우스때 백인대장으로서 반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여 왕위를 찬탈하여 비잔티움 황제가 되었고 610년 반란으로 제위에서 쫓겨났다. 당시 역사가에 따르면 그의 외모는 붉은 곱슬머리에 툭 튀어나온 짙은 눈썹은 코에 닿을만큼 길었고 추한 몰골이었으며 잔인한 성격으로 사악한 고문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치세 8년동안 공포정치로 수많은 경쟁자와 관료들을 고문해 죽였고 전임황제의 측근과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은 모두 처형했단다. 

열공

 

동부의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이에 반발한 유대인은 그리스도 인들을 학살했으며 그의 편집증적인 불안으로 이어진 고문과 숙청때문에 나라는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되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고, 

 

이 혼란을 보고 있던 카르타고 총독 헤라클리우스는 608년 군대를 모아 제국을 장악하려고 시도하고 두 아들에게 군대를 주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게 하였고, 그 아들 중 젊은 헤라클리우스가 610년 포카스를 붙잡아 처형하고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포카스는 헤라클리우스에게 처형될 때 여러 조각으로 잘려 사냥개들에게 던져졌다고 한다.

안돼

 '비잔티움 연대기'제1권:창건과 혼란, 바다출판사, (2007) 

 

반란으로 일어난 자 반란으로 멸망할지니...

열공

 

이 포카스기둥은 바로 그 포카스 황제가 판테온을 카톨릭 성당으로 개조하여 교황에게 봉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기원후 600년에 세운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높이는 13.6미터라고 한다. 

 

 

에밀리아 바실리카와 코미티움 광장 동쪽편에 위치한 안토니노 신전과 파우스티나 신전(Tempio diAntonino e Faustina)

 

왼쪽의 기둥 열개짜리 신전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부모였던 안토니노 피우스가 기원전 141년 황후 파우스티나를 위해 바친 신전, 안토니누스 황제때 짓기 시작하여 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때 완성되었고, 고린트 양식의 원주로  후에 안토니노 피우스도 여기에 매장되었단다.

 

11세기에는 성 로렌초 인 미란다 성당이라는 이름의 카톨릭 성당으로 되었고 앞면은 신전의 일부를 재견하는 형태로 1602년에 건축되어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단다. 

그 외 비너스와 로마의 신전이 허물어진 장소에 중세기의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가 세워졌다.

 

 

사진 바로 앞쪽의 철창으로 둘러싸인 네모난 구덩이는 로마건국신화와 관계가 있는 Lacus Curtjus 구덩이이다. 

 

가운데 보이는 세개의 기둥은 디오스쿠오리신전이다. 

기원전 495년 로마가 라틴연맹군을 무찔렀던 레길루스호수 전투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제우스와 레다사이에 태어난 쌍둥이며 트로이 헬레나의 형제들인 카스타와 폴룩스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현재의 신전은 티베리우스가 2대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기원 후 6년에 재건한 것

 

왼쪽 하얀 기둥과 집터는 베스타 신전(Tempio di Vesta)이다. 

베스타 신전은 로마제국의 모든 부뚜막의 불을 상징하는 신전으로 가족, 가정, 화톳불 등을 주관하는 처녀신인 그리스의 헤스티아 신과 같은 의미의 신이다. 

 

원형 평면으로 된 유적으로 이 신전에는 미네르바 여신의 형상과 로마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천년동안 꺼지지 않는성화가 모셔져 있는데, 성화가 꺼지면 흉조라 여겨서 귀족 가문에서 선발한 7-8세의 처녀들이 30년간 순결을 지키며 이 신전을 지켰는데 이 성스러운 업무를 마쳐야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고 한다.

 

처녀 제관(무녀)들은 순결을 잃는 경우 생매장당해 죽었다고 하는데, 신전 뒤에는 191년에 마지막으로 고쳐서 세운 처녀 제관들의 집 유적이 있다.

 

현재의 신전은 205년에 셉티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건조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신전은 무녀들의 희생으로 지켜져 온 신전인듯...

 

 

게모니아 계단, 일명 슬픔의 계단을 다시 올라 콜로세움가는 길로 향한다. 

 

 

 

이 길로 얼마나 많은 넋들이 죽음을 향해 걸어왔다가  

넋으로 돌아갔을지...조금 으시시...

열공

 

 

역시나 마메르틴 감옥을 지나고

 

 

산타루치나 마르티나 성당도 지난다.

 

올라가보지 못한 캄피톨리오 언덕을 내려와서 우측으로 돌면 바로 콜로세움 가는 길

 

 포로로마노 가운데 지나가는 도로 아래의 건물터

 

 포로로마노에서 콜로세움으로 가는 일직선상의 이 거리는 바로 사크라(Via Sacra) 거리

이 길을 지나면서 우측으로 포로로마노가 자세히 보인다.

팔라티노 언덕도 보이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역시나 거리의 연주자들

노끈 같은 것으로 이쁜 새를 접어주는 아저씨, 손재주도 좋다.

 

이것저것 무척 달고 맛날 듯한 지중해의 과일들

샤방3

과일귀신인 내가 이또한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흑....

 

 

 

드디어 이 길 끝에 콜로세움이 보인다.

굿잡

 

 

 

참고로 포로로마노의 신전, 포럼 등의 위치를 추적하고자 콜로세움 쪽에서 바라본 포로로마노의 건물 배치도를 인용한다.(위키미디어)

 

나보다 더 포로로마노를 연구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

덕분에 이해를 좀 더 쉽게 할 수 있었다.

다음에 이곳에 가실 분들은 참고하고 가면 훨씬 이해가 쉬울 듯 싶다.

 

 

 

Ps. 결산서류 정리, 마을 홈페이지 개선작업 중 오류 무지막지 발생, 전라도와 충청도쪽으로 2박 3일 벤치마킹, 홍천군 정보화마을 운영위원 워크숍 1박 2일, 큰아들의 휴가, 막내 아들의 고등학교 입학추첨...기타 등등으로 엄청나게 바쁜 달이었네요.

 

원래 한달 전부터 쓰고 있던 여행기였지만 이제서야 겨우 마무리했네요.

부족한 점 많더라도...이해해 주세요^^

 

다음엔 콜로세움? 

언제가 될런지 모르지만요^^;;

아직도 마음은 로마에서 헤매고 있네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