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국외)/이탈리아

성베드로 광장(유럽 여행기4)

삼생아짐 2014. 12. 14.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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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베드로 성당을 나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무엇일까?신상

그건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일게다.

 

문득......생각해보면 내가 죽는 것 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혹은 그 죽음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더 슬플 듯 싶다. 

그 대상이 부모이든, 자식이든, 남편이든, 친구이든, 혹은 연인이든간에......

 

그래서...언제나 슬픔은 남겨진 사람의 몫이라 하지 않는가?

(어디서 들었던 듯 싶다. 혹은 내가 지어낸 말일수도?...

감사

 

제목을 '성베드로 광장' 이라 해놓고 뚱딴지 같이 무슨 죽음 타령이냐고? 

??

 

 

바로 이 사람들 때문이다.

 

이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은 바로 교황청, 즉 바티칸시티를 지키고 있는 스위스 용병(Reisläufer, 라이슬로이퍼) 

들이다.

라이슬로이퍼는 '전쟁에 나서는 자'라는 뜻.

 

중세 스위스 주정청에서 조직한 후 근세까지 유럽에서 맹위를 떨쳤고, 현대까지도 맥이 이어지고 있는 용병 부대이다.
프랑스의 외인부대와 더불어 용병의 전형으로서,
지금도 용병 하면 많은 이들이 스위스 용병을 떠올린다고.
 

 

 

 

유럽역사를 보면 스위스 용병들의 의리와 책임감, 명예로운 죽음, 그리고 용감함에 대해 종종 듣게 된다.

 

이탈리아 내에서 이탈리아인이 아닌 스위스 용병들이 왜 이 바티칸시티를 지키는 일을 하게 되었을까?

??

 

 

처음에는 교황청 근위병들도 여러 나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527년 벌어진 사코 디 로마(로마 약탈) 당시스위스 용병들은 카를 5세의 군대에 맞서 교황 로마를 사수하고자 치열하게 싸웠지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이들의 충성심은 불변하여 42명만이 살아남는 패전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고용주인 교황을 위하여 싸웠다고 한다. 

 

이 영웅적인 활약으로 인해 스위스 용병은 체면을 살릴 수 있었고 바티칸에서는 지금까지도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며, 매년 로마가 함락당한 5월 6일마다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병은 110명으로 모두 남성이며 복무 기간은 최소 2년을 기준으로 연장가능하다고. 

근위병의 조건은 만 30세 미만의 가톨릭 신자로 미혼이어야 하고, 키는 174cm 이상이어야 한단다. 다만 근위병이 된 이후에는 결혼할 수 있다고.

한편 교황청 근위병에게는 매달 1800스위스프랑의 월급이 지급되고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40만 원 정도).

스위스에서는 이제는 스위스 국민이 외국 군대에서 근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유일하게 교황청 근위병은 허락하고 있단다.

 

월급이 좀 짜다(!)는 생각이...

아, 신앙이나 명예가 그 박한 보수를 견디게 하는건가?..싶기도 하다.굿보이

 

 

 

 

스위스 용병의 의리와 용맹함, 충성심에 관한 또다른 일화는 프랑스 대혁명일때다.

 

프랑스에서도 이들은 앙시앵 레짐 내내 프랑스 왕가의 충성스러운 근위대로서 그 지위를 잃지 않았다. 

 

위그노 전쟁 때에도 왕실을 위해 카톨릭 진영에서 위그노들과 맞서 맹활약을 펼쳤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를 지키다가 전멸하고 만다.

 

루이 16세의 근위대도 모두 도망가고 체념한 루이 16세가 스위스 용병들에게 떠나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떠나지 않고 786명 모두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그들이 떠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품에서 나온 쪽지(유서)에 답이 있었다고..

그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떠날 경우 신의를 잃고, 그들의 후손에게는 다시는 용병으로서 고용될 기회가 없을 거라는 말...

참 가슴 아픈 말이었다. 

 

스위스 루체른에서는 이 사건을 빈사의 사자상으로 기념하고 있다.

 

루체른 호프교회 북쪽의 작은 공원안에 덴마크 조각가 토르발센이 자연석을 쪼아만든 것으로 1821년 독일 출신의 카스아호른에 의해 완성되었다. 

사자가 지키고 있는 것은 부르봉왕가의 상징인 백합무늬가 있는 방패이고, 사자의 등에는 창이 꽂혀 있다. 

사자상 밑에 벽에는 희생당한 용사들 786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자의 모습은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며, 

'톰 소여의 모험'등 명작을 남기고 '침대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다. 80%이상이 거기에서 사망하니까' 등등의 명언을 남긴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이 사자기념비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표현했다. 

 

 

 

 

 

스위스 여행기에 가서 다시 다루겠지만 스위스는 내륙국인데다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같은 산지여서 무역과 산업이 발달할 기틀이 없었고, 따라서 가난했던 스위스는 용병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으며, 국가사업으로까지 유지시켰다. 

 

 

또한 중세 스위스의 역사는 지배자인 합스부르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끊임없는 항쟁의 역사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히 수많은 전투를 겪은 베테랑들이 양성되었고, 험준한 환경 속에서 전투를 겪으며 단련된 이들은 자연히 타지로 나와서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이탈리아, 프랑스 등 주변국가에 용병으로 진출해서 돈을 벌어올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전쟁에 나가든지 스위스의 용병들은 최후까지 고용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움으로써 그 명예를 지켜왔고, 그 죽음은 슬프거나 헛된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져왔다고 한다.

 

그러나...그러나...

사랑하는 남편을, 자식을, 형제를 남의 나라 전쟁터에 나가 대신 싸우고 목숨을 희생하는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여자의 입장에선 가장 슬픈 일이었을듯 싶다.

신상

 

잠시 기분전환.

 

저 스위스 용병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복장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거란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지 5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그 디자인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미켈란젤로의 예술성이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에서 그림, 건축, 디자인까지 모든 분야에서 그 예술적 감각이 정말로 뛰어난 사람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밖에.

HAAA

 

 

 

 

성베드로 광장은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자리한 광장이다. 

일명 산피에트로광장(Piazza San Pietro)이라고도 한다.

 

광장이 들어서기 전의 성당 앞은 수많은 집들과 복잡한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무질서해 보였단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요청으로 건축가 라이날디가 육각형, 사각형, 원형, 타원형으로 된 설계안을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알렉산드르 7세 교황때에 이르러 광장 조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르 7세 교황은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수석 책임자이자 친분이 있었던 잔 로렌초 베르니니 (Giovanni Lorenzo Bernini)를 선정하여 광장을 설계하도록 했다.

 

당시에는 광장 조성에 너무 많은 돈이 쓰일 것으로 예상하여 사람들이 반대를 했고, 교황은 빈민과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 로마시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며 강하게 밀어붙여 결국 베르니니가 1656~1667년, 12년 동안에 걸쳐 설계를 하고 완공시켰다.

 

 

 

성베드로 대성당에는 모두 아홉개의 발코니가 있다.
 
세어보시라, 이층에 해당하는 창문 앞, 톡 튀어나온 부분들...
그 중 가운데 입구 위로 길게 내뻗은 난간은 바로 강복의 발코니(Loggia della Benedizione)라 부른다. 새로 선출된 교황은 '로마시와 전세계'를 향해 첫번째 축복을 내린다.
 
텔레비젼에서 본 기억이 있지 않은가..오케이
 
이 발코니에 서서 교황은 성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하고, 신자들에게 축원을 내린다. 
알렉산데르 7세는 베르니니에게 인파가 교황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도록 설계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따라 베르니니가 처음 설계한 광장의 형태는 사다리꼴모양이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설계해 르네상스양식을 극대화한 것으로 찬사를 받은 캄피돌리오 광장이 바로 사다리꼴 형태였기 때문에 대선배의 업적을 참고한 것이었으나, 목재 구조물을 만들어 광장 예정지에 세워본 결과 광장을 둘러쌀 회랑이 사도 궁전에서 교황이 등장하는 창문을 가리는 것으로 드러나자 사다리꼴 설계는 철회되었다고 한다. 

 

광장 예정지에 있던 건물들을 철거하는 동안에도 형태와 규모가 확정되지 않은 가운데, 1657년 3월 베르니니는 사각형 양쪽에 반원 하나씩을 붙인 타원형 모양을 제안했으나, 이걸 본 건축위원회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찮자, 베르니니는 원 두 개를 포갠 타원형 모양, 다시 말해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광장을 다시 제안하면서 비로소 건축위원회와 교황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의 돔에서 내려다본 광장 

 

이 사진 빌려왔다. 

외국 여행사이트인데 설마 저작권침해로 걸진 않겠지?

안들려부르르2

베드로 성당을 둘러 보면서 미켈란젤로 돔에 올라갈 시간은 전혀(!) 나오지 않았으므로......

 

나도 어쩔수 없었다.ㅠㅠ

분노3

 

광장의 평면은 열쇠구멍 모양인데 이는 베드로의 지물이 천국의 열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르니니는 광장의 형태를 결정한 후 둘레를 에워쌀 회랑을 설계했는데, 처음에는 아케이드로 만들려고 했지만 나중에 열주랑으로 설계를 변경했다고 한다. 

 

성당을 머리로, 열주랑을 팔로 비유해 두 팔을 편 교회의 어머니인 성 베드로 대성당이 광장에 들어온 신자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종교와 종족, 언어, 관습, 신분 등을 초월한 사랑으로 이곳에 온 사람들을 포옹하는 의미라고...

 

 

즉 성모마리아 혹은 그리스도가 두 팔을 벌려 신도들을 끌어안는 형태?

샤방3

 

실제로 올해,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걸음을 기억한다.

소외되고 낮은 곳에 처한 사람들, 고통과 불행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보듬어 안아 주신 분.

그분을 보면서 나도 참 많은 위로를 받았었다.

 

그분이 올해 이 베드로광장에 노숙인 샤워 시설을 설치하라고 하셨단다.

교황이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은 교황의 측근이자 사회복지 책임자인 콘라드 크라에프스키 주교가 겪은 일화 때문이라고.

 

크라에프스키 주교는 거리에서 생활하던 프랑코라는 노숙인의 50세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몸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극구 거절했다고...

그래서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로마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쉽지만 씻을 곳을 찾기란 너무 어려웠다고 하는 말을 듣고 교황에게 전달하자 교황이 노숙인들을 위해 씻을 곳을 성베드로 광장 돌기둥 사이의 공중 화장실에 샤워실 3개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11월 17일부터 공사를 시작했다는데, 

우리가 유럽에서 돌아온 날짜는 16일이니 확인할 기회는 못 가졌다.

문자

그래도 교황의 그 배려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또 지난해 11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회복지 책임자에 임명하면서 크라에프스키 주교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책상이 필요없을 테니 그것을 팔아도 되고, 바티칸에 앉아 누군가 도움을 청하길 기다리지 말고 밖으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찾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감동, 또 감동...

하트2

 

 

 

어쨌든 이 광장의 형태는 대성당의 입구에서 좌우로 안정된 타원꼴을 만들고, 가운데에서 반원씩 갈라져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모양이다.

 

대성당 바로 앞에 있는 사다리꼴 모양의 작은 광장과 열주랑이 둘러싼 타원형 광장이 합쳐지면서 광장의 전체적인 평면을 열쇠 구멍모양으로 구성해 

초대 교황 성 베드로의 지물인 열쇠를 상징하는 효과까지 더해 오늘날의 성베드로 광장의 모양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는 것.

 

 

 

 

열주랑의 좌우 너비는 240m로, 정면 끝은 성베드로대성당의 입구에 해당하고, 반원형인 광장 좌우에는 그리스 건축양식인 도리스양식 원주 284개와 사각으로 된 기둥이 각각 네줄로 88개가 회랑 위의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이 열주랑 안에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돌면 100미터 달리기를 두번도 더 해야한다.헥헥..아자

 

화랑바닥에서 천장까지는 그 높이가 16미터나 된단다.

 

 

 

 

열주랑 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고, 그와 더불어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제작한 역대 교황과 성인들의 대리석 조각상 140개가 늘어서 있으며 , 당시의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문장도 이 열주랑위를 장식하고 있다. 

대리석 조각상의 높이도 자그마치 3.24미터나 된다고.

 

 

 

베르니니의 열주랑이 건설되기 전까지, 마데르노가 만든 대성당의 정면은 돔을 시야에서 가리고 건물의 폭이 넓어보이게 해 미켈란젤로가 의도한 균형과 비례를 깨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단다.

 

그런데 베르니니의 열주랑은 대성당의 정면보다 낮으면서도 안쪽으로 끌어당기도록 되어 있어 정면부가 더 높아보이도록 해 불균형적인 상태를 상당 부분 해결하는데 성공했다고. 

 
 
이 열주랑에 관해 재미있는 관찰 한가지
 
 
수녀님이 서 계신 저자리, 발 밑에 이중 둥근 원이 있다.
 
 
바로 요렇게 생긴 곳
요 원위에 서서 열주랑을 보면 네줄로 된 회랑의 맨 앞줄만 보인다. 
 

 
즉 네줄이 아니라 한줄처럼 보이는 것. 나머지 세 줄은 어디론가 쓰윽~~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한 걸음 옮기면, 다시 보인다.홧팅2
 
 
조금 더 옮기면 나머지 세 줄이 짠~~~~다시 나타난다.오케이2
기가 막힌 구도다.
베르니니의 천재성을 눈 앞에서 확인!!
(왜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건축 공부를 하러 떠나는지 알겠다.)
원안에 서 봤다가 다시 나와봤다가, 서 봤다가 나와봤다가.....재밌다.ㅋ굿잡
 
더 재밌는 건, 그 옆에 줄을 길게 선 사람들...
베드로 성당에 입장하려고 쭈욱~~긴 줄 서 있는 거다.
예약하지 않고 오면 이렇게 요기도 보통 두시간은 줄을 서야 한단다. 
 
난 다 보고 나왔지롱^^호호(남의 불행에 재밌어함 안되는뎅...ㅎ)
 
 
아, 성베드로광장 구조 설명하다가 놓쳤다.
성베드로 성당을 나오자 마자 만난, 입구에 서 계신 이분, 성베드로 성당앞에 서 있는 동상의 정체는? ??
 

초대 교황이자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하나인 성베드로와 사도바울로 알려진 성바오로의 동상이다. 

성당 전면, 이쪽 끝과 저~~~어쪽 끝에 서 있다.

왼쪽에 열쇠를 든 이분, 바로 성베드로다.

 

닭이 세 번 울기 전 예수를 부인했다던, 그리고 참회하여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감히 예수님처럼 똑같이 할 수는 없으니 거꾸로 매달아달라고 했던 그 베드로다.

이 성당이 있게 한......

 

 

 

보이는가, 저~~~~쪽 끝에 작은 동상...ㅋ

오케이

당연히 저 분은 사도 바울일터이지.

 

바티칸 박물관과 성베드로 성당을 수박 겉핥듯 보았지만 그래도 거의 세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한번도 안 앉고 계속 걸으며 본 지라 다리가 조금 아파 저쪽 끝까지 달려가질 못했다.후회...

화장실2

다음에 여러분들 가시면 꼭 보고 오시길^^

셀카2

 

 

 

 

동상의 뒤쪽, 성베드로 성당 위에 서 계신 분들은 중앙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열한 제자의 대리석상이고 오른쪽 끝에는 유다 대신에 제자로 뽑힌 사도 마티아의 석상이다.

 

약 6미터에 달하는데 다른 것들이 워낙 커서 상대적으로 작아보인다.

그런데 저 동상들..제작해서 모두 지붕위로 올리려면 참 만만찮은 품이 들어갔겠다...싶다.

으쌰

 

성베드로성당 정면에 위치한 기둥 8개의 높이또한 27미터이고 지름은 약 3미터란다.

어쩐지 베드로 성당 들어설 때 어마어마 하더라니...

 

하긴 성베드로 성당 자체가 전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라 했으니, 그럴밖에.

건물의 높이 45.44미터, 넓이는 114.69제곱미터란다. 

그 어마어마함은 이미 성당 내부에서 충분히...확인했다.

 

어쨌든...쳐다보기엔 너무 까마득하고 목이 아파서 볼 수가 없었다.

슬퍼3

내겐 너무 멀고 높은 당신들...슬퍼2

 

 

 

 

마다 설날이나 성탄절 등에 교황과 함께 전세계의 카톨릭 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보는 곳,

어떤 사람은 6만명 수용, 어떤 사람은 30만명 수용, 어떤 사람은 7만명 수용이란다.

 

이거 원, 의자갯수를 세어 보든가 해야지, 누구말을 믿어야할런지...

안들려

그런데, 6만이나 7만은 30만명 안에 들어가니...30만명이라 해야 하나?

(위키백과에서 그랬으니 믿어야 할 밖에...)

 

 

 

성베드로 광장에서 주의깊에 봐야할 것 중 하나인 오벨리스크 [obeliskos], [obelos]이다.

'바늘'이란 뜻을 가진 이 오벨리스크는 높고 좁으며, 네개의 면을 가진, 

즉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기념 건조물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혹은 클레오파트라의 돌이라고도 하는데, 사실 클레오파트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고대 오벨리스크는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원래는 이집트에서 태양신 '라'를 숭배하기 위해 묘(피라미드)앞에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나중엔 신전앞에...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과시하는 문장이나 모양을 새겼다는데 현존하는 최대의 것은 이집트 18왕조 하트셉수트 파라오의 카르나크 신전에 세운 것으로 높이 30미터라고 한다.

 

위 사진은 이집트 아스완채석장에서 오벨리스크를 만들다 만 과정.(미완성. 그 길이가 약 41.7미터라고...)

저렇게 커다란 바위에서 오벨리스크를 똑 도려낸다.ㅋ

 

당시 이집트인들은 철기가 아닌 청동기를 사용했다는데, 무른 청동으로는 돌을 쪼아낼 수가 없어 돌에 몇개의 구멍을 뚫고 말린 쐐기목을 넣은 후 물을 부으면 쐐기가 팽창해서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

그때의 압력으로 돌을 원하는 크기대로 잘라냈단다.

이렇게 잘라낸 돌로 피라미드도 만들었다고.

 

참으로 지혜로운 민족이었다, 이집트인은.  

휴가

(아스완 채석장...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인가, 그 소설에서 읽은 적 있다. 이집트의 건축에 쓰인 돌들은 모두 아스완채석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언제가 기회되면 이집트에도 꼭 가봐야겠다.꼬옥!!!)

커피한잔

 

 

 

이곳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광장 한가운데 원의 중앙에 세워진 것으로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원래 오벨리스크는 모두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던듯...로마에만도 15개가 있단다.

모두 이집트에서 가져온거...정확히 말하면...뺏은거)복수

 

기원전 13세기에 세워진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이집트의 사이스에 있던 쌍의 한쪽이다.

 

이시스 사원에 놓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로마로 옮겨졌는데 1655년에 발견되었고, 교황 알렉센데르 7세에 의해 베르니니의 코끼리 기초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한쌍 중 다른 한 쌍은 우르비노에 있다고.

 

네로경기장의 중앙 스피나로 기원후 37년 칼리굴라 황제가 옮겨서 세웠다고 한다,

네로경기장은 현재 대성전의 왼쪽에 남아 있는데, 이 오벨리스크는 교황 식스토 5세의 지시로 기술자겸 건축가인 도메니코 폰타나가 옮겼다고 한다. 

 

이탑을 옮기는 작업에는 수백필의 말과 수천명의 근로자가 동원되었고, 굵은 나무와 밧줄, 안적목 등을 사용하여 무게가 320톤이나 되는 돌덩이를 옮겼는데, 이 작업이 엄청 힘들고도 주의를 요하는 작업이라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어떤 소리도 내어서는 안된다는 엄명이 떨어졌다고.

 

그런데 작업도중 밧줄과 밧줄이 마찰을 일으키며 불이 붙자 한 선원이 밧줄에 물을 부으라고 소리쳤다고.

사실 그대로 진행했다가는 많은 사람이 다칠 수 있는 위기상황.

 

그 선원 덕분에 무사히 작업을 마치자 그는 처벌받는 대신에 교황으로부터 성 베드로 성전에 종려나무잎(성지가지)를 공급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고 그 후손은 오늘날까지도 그 특권을 누린다고... 

세상 그 어떤 법이나 규칙도 사람의 생명보다는 소중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네...굿보이

 

 

 

바티칸의 오벨리스크는 로마에서 유일하게 한 번도 쓰러진 적이 없는 오벨리스크라고 한다. 

중세때에는 이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금으로 된 공에 율리우스 케사르의 유골이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는데 나중에 폰타나가 금속공을 꺼내었을때 먼지만 있었단다.

지금은 로마미술관에 보관중이라고.

 

오벨리스크 꼭대기에는 키지 알바니 가문의 청동문장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와 군림을 나타낸다고...이 십자가 안에는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원본의 일부가 들어있다고 한다.

 

참...그렇다. 이민족의 종교를 누르고 자국민의 종교승리라니...

뭐, 한때 성당에도 교회에도 나가기도 했던 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종교를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멍2

 

오벨리스크 중간에는 청동으로 된 사자상과 독수리가 장식되어 있다.

독수리는...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유희왕'에 나오는 거신병? ㅋ

 

 

 

오벨리스크에 쓰여져 있는 글자들

 

원래 이 오벨리스크에는 상단에는 이집트 문자, 중단엔 이집트 민중들이 쓰던 문자, 하단엔, 고대 그리스어로 태양신 숭배와 파라오의 치적을 나타내는 글귀들(람세스 2세)이 새겨졌다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자는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사제들에 의해 그 글자(상형문자)를 밀어버리고 '찬양하라, 성부~'등과 같은 라틴 글자를 음각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나 세계 여러나라에 있는 오벨리스크들은 이집트를 침략했던 로마에 의해 반출된게 대부분이라고...

 

자국의 유물인것처럼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은 식민지 쟁탈에서 성공했다는 자국의 위세를 드러내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파리 콩코드 광장에도 한 개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는데, 이집트의 총독이 증정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약탈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왜냐하면 이집트 정부에서 반환을 요구했단다. 줘놓고 뺏지는 않을 터이고, 파리 루부르 박물관에 갔을 때 본 대부분의 유물들은 사실 전 세계에서 훔쳐간 것들이니...

 

내가 파리 루부르박물관 갔을 때 '도둑놈들의 박물관'이라 했더니 가이드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라며 어이없다는 듯 혹은 어정쩡하게 웃으시더라.부르르2

 

뭐 기증받거나 사들인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 몰락한 귀족들에게서 징발한 것이고, 나폴레옹이 세계를 정복할 때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들이니...내 표현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흥4

 

 

 
이 오벨리스크는 광장 한가운데 놓여 광장의 웅장함을 알리는 역할 외에도 해시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바닥의 하얀선은 시계의 눈금같은 역할,

오벨리스크의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참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오벨리스크다.

 

개인적으론...국권이 약화된 나라는 강대국의 만행과 약탈과 횡포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분노3

그래도 이곳, 카톨릭의 성지에 놓이게 된 것을 영광이라 해야하나...

 

그래도...그래도 이집트 입장에선 아닐 듯 싶다.

 이집트에 카톨릭 신자가 많다면 또 모를까.

신상

 

 

 

 

또 한가지, 주의깊게 볼 것.오케이3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쪽에 화려한 바로크문양으로 장식된 두 개의 분수대다. 대성당을 바라보면서 오른쪽 분수대는 대성당 정면을 설계한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고 왼쪽은 도메니코 폰타나가 설계했다고 한다.

 

원래 이 분수대가 있던 자리에는 브라만테가 세운 분수가 있었는데, 교황 바오로 5세가 마데르노에게 이 분수를 헐고 새로운 분수를 지으라고 했단다.

 

그런데 이 분수대가 성베드로의 성당 중심축에서 벗어나 버려 대칭적인 위치에 새로운 분수를 지을 수 밖에 없었고, 베르니니가 설계했으나 수량이 충분치 않아 카를르 폰타나가 제작한 이 분수는 새로운 수로를 확보한 1675년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갈 때 물로써 죄를 깨끗히 씻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어, 실제 이곳에 순례 왔던 사람들은 양쪽 분수대의 물을 손으로 떠서 머리위에 먼저 뿌린 후 대성당으로 들어갔다고...

내가 갔을 땐 분수가 멈추어서 그냥 물 먹는 식수대로 착각할 정도? ㅋ하하

 

 

 

광장을 볼만큼 보았으면 오른쪽으로  잠시 시선고정

 

저 뒤의 건물은 '사도궁전'(Palazz Apostolico) '바티칸 궁전 또는 교황궁으로 불리우는 곳이다.

 교황이 직접 거주하며 집무하는 곳으로 5세기 무렵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로마를  방문하는 외국사절을 접대할 때만 사용되었다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라테란에서 다시 사도궁전으로  돌아오면서 교황의 정식 주거지로 확정되었다. 수세기에 걸친 증 ·개축에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조각·회화의 거장들인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베르니니 등의 거장들이 지상에서 가장 훌륭한 궁전으로 꾸미려 했다고 한다. 

견고한 이 궁전에는 장중하고 웅장한 1,400개가 넘는 방과 천 개에 달하는 계단, 스무 개의 안뜰, 수천 채의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이들 속에 박물관, 도서관, 화랑, 전시실 등이 무수히 포함되어 있다고.

 

궁전의 최고층에 있는 교황의 사저는 궁전의 두 측면을 둘러싸면서 복도로 이어지고 이 복도는 프레스코 그림들로 장식된 오래된 로지아(한쪽에 벽이 없는 복도 모양의 방)로 연결되어 있다. 교황 사저에는 현관, 서재, 교황 비서실, 그리고 주일이면 순례객들을 향해 축복을 내려주는 직무실, 침실, 대리석 목욕탕, 영화 상영실, 의료실, 개인 경당, 작은 거실, 식당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기도 사건이 있은 후 교황청 당국은 저격수로부터 교황을 보호하기 위해 교황 전용 테라스와 창문 앞 강단에 방탄 유리를 설치하였다고.

 

운이 좋으면 여행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한다는데 그날 내 운은 별로였나보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아무도 안 내다보더라...슬퍼3

 

그 너머 뒤로는 바티칸 박물관이 있을 듯...

 

 

 

저어기 멀리 보이는 길...건물들 사이...

 

 

 

 

 

 

바로 요 길인데, 이 길은 "화해의 길"이라는 뜻의 '비아델라 콘칠리아치오네'로 광장입구에서 로마 도심으로 이루어지는, 즉  대로를 따라 산탄젤로 다리까지 이어져 있는 길이란다.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는 1929년 로마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즉 무솔리니 사이에 이루어진 라테란 조약을 기념하고자 1937년 착공하여 1950년에 개통한 길이다. 

 

이 길 양편에는 원래 중세시대 아파트 700여채가 있었는데 대성당을 가리지 않기 위해 무솔리니가 허물어 버리고 나즈막한 건물들도 새로 지었단다. 

 

그 오래된 건물을 성당을 가린다고 완전 허물어 버릴 정도면...

그러고보면 제대로 화해한게 맞네...프로포즈

 

 

 

최신식 2층 버스가 지나는가 하면

 

 

 

말이 끄는 마차도 지나간다.

 

 

 

간이매점도 보이고...

 

 

 

 

바티칸 미술관과 성베드로 성당, 그리고 성베드로 광장을 떠나오며 문득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 나라를 방문했다가 떠나면서 남겨준 말씀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 내것은 하나도 없다'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보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과 시간, 열정, 정성을 쏟아 붓습니다
예뻐져라, 멋져라, 섹시해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 마라, 늙지 마라, 제발 죽지 마라...!


하지만 이 몸은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 야위고, 병이 들락 거리고 노쇠화되고 암에 노출되고 기억이 점점 상실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구를 내 것이라 하고 어느 것을 내 것이라고 하던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미워도 내 인연 고와도 내 인연
이 세상에서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고통인 것을...!

피할 수 없으면 껴안아서 내 체온으로 다 녹이자
누가 해도 할 일이라면 내가 하겠다.

스스로 나서서 기쁘게 일하자
언제 해도 할 일이라면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에 하자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 쏟자
운다고 모든 일이 풀린다면 하루종일 울겠다.
짜증부려 일이 해결된다면 하루종일 얼굴 찌푸리겠습니다.
싸워서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누구와도 미친듯이 싸우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일은 풀려가는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 양보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배려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낮춰 논 눈높이 내가 조금 덜 챙긴 그 공간
이런 여유와 촉촉한 인심이 나보다 더 불우한 이웃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희망 공간이 됩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이 정말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정말 고마움과 감사함의 연속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

 

 

 

Ps. 여행 다녀 온 지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가네...

아직도 로마에서 헤매고 있으니...

 

함께 다녀온 분이 여행기 다 나오려면 멀었냐고...멀었지...라고 물어보신다.

"원고료 나오는 거 먼저 썼어요..ㅋ"

 

대답했는데, 좀 부끄럽긴 하다.ㅋ

 

오늘 쓴 것까지 유럽 여행기로 치면  아직도 로마 도착한 첫날...오전에 본 것들에 머물러있다.

 

그 사이 간간이 블로그 기자로 활동하던 곳에 원고를 보내긴 했지만...

아직도 멀다.

그리고 졸리다....

졸려4

지금 시간 네시 6분...

 

가끔 그런 생각든다. 누구를 위해 이 짓을 하고 있지???

꾸준히 들어오시는 분들 생각하면...죄송하긴 하지만...난 정말 여행작가 될 자질이 있을까, 회의도 들고...

 

그래,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대로 이세상에 내것인게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싶다.

내 몸뚱이도 내것이 아닐진대...

 

그리고...이제 정말 졸리다.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이젠 정말 꿈나라로 가련다. 바이~~

B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