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년농사의 반이라 하는 우리 집 못자리 하는 날입니다. 못자리라 함은 볍씨를 발아시켜 모상자에 흙과 함께 넣고, 어린 모를 비닐 하우스안에서 키워 논에 내보내기 전까지의 단계를 못자리라 한답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 이전까지는 논에다 볍씨를 직접 뿌려 벼를 수확했지만, 백성의 생활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에 의해 어린 모를 키워 논에다 내어 심으면 훨씬 더 많은 수확을 할 수 있게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우리네 농촌에서 대대로 이어내려오게 된 벼농사의 기법입니다.
이틀전, 볍씨를 소독하고 발아기에 넣어 싹을 틔우고, 혹 모자를까 싶어 함지에 소독약을 풀고 담아두었는데 날이 얼마나 추운지 볍씨 담은 물이 꽁꽁 얼어버렸네요. 그래도 전날 저녁 건져내어 물기를 빼었는데, 아뿔싸, 물기가 덜 빠져서 이 볍씨가 파종기를 빠져나오지 못해 바람에라도 마르라고 잠시 널어두었네요.
하얗고 조그맣게 싹이 튼 볍씨 보이시죠??
요 눈들이 잘 터야 못자리에 가서도 뿌리를 잘 내리고 어린 모로 잘 자라게 되지요.
실처럼 조금 길게 매달린 녀석들도 무시하지 마세요. 이녀석들은 벼를 수확했을때 무서운 가시가 된답니다.
예전에 집에서 수확한 벼를 남겨두었다가 볍씨 종자로 사용하였는데 햇볕에 널어 말리는데 이녀석들이 제 피부에 달라붙고, 코로 눈으로 들어가 엄청 고생했답니다. 멋모르고 반팔옷에 맨손으로 만졌다가 따끔따끔, 녀석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쓰라린(?)경험이 있네요. 그러고보면 식물들의 자기보호력도 참 대단하답니다. 우리는 흔히 장미가시만을 이야기하지만 오이도, 가지도, 호박도, 대추도 모두 크고 작은 가시가 있고, 가루 등이 있어 멋모르고 만지면 당하기 쉽상이랍니다.
모판에 들어갈 흙을 상토흙이라 하지요.
예전에는 이 흙을 산에서 일일이 퍼날라서 체에 쳐서 돌을 걸러내고 고운 흙만을 받아 소독약을 치고, 상토흙으로 사용했는데 이제는 흙을 구하기도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려 비료처럼 포대에 담겨져 나오는 상토흙을 사용하니 번거로움도 줄고, 힘도 덜 들고, 논농사도 많이 편해졌지요.
그리고 상토흙과 볍씨가 담길 모상자, 오늘의 제 보직이랍니다.
기다란 파종기에 이 상자를 하나씩 공급해 주어야 흙을 담고, 볍씨를 뿌리고, 다시 흙을 덮어 못자리로 나가게 되는 거지요.
제가 이 상자 공급을 담당했는데, 이게 그리 쉬운 보직은 아니더군요.
가만히 앉아서 돌아가는 기계에 하나씩 넣어주는데,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가니 전 엉덩이를 떼거나 한 눈 팔 새가 없어요. 한 장이라도 덜 넣으면 흙과 볍씨가 바닥으로 흘러버리니 계속 계속 넣어주어야 된답니다. 한참을 하다보니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건만, 연일 품앗이로 일다니던 남편 생각을 하고 말도 못하고 꾹 참아야 했네요.
군데군데 빈 것들은 맨 끝자리에 앉은 손짝이 다시 채워넣어주죠.
상자를 공급하는 사람, 흙을 공급하는 사람, 볍씨를 공급하는 사람, 빠진 곳을 채워넣는 사람, 날라서 쌓는 사람, 이렇게 기본적으로 최소한 다섯명 이상이 필요한 공동 작업입니다. 즉 혼자서는 못자리를 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지요. 예전에는 10명 이상이 모여야 가능했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흙을 공급하고 씨를 자동으로 공급하고, 다시 덮어주는 파종기란 기계 덕분에 많이 간소화되었습니다.
시골은 일손이 딸려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지 않으면 농사짓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웃끼리 토라졌다가도 금방 화해하고,원수처럼 치고받고 싸우다가도 다시 가족이 됩니다.
네것,내것의 소유와 이해타산의 경계가 분명한 도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가지 않는 정서가 분명 농촌에는 있습니다. 저또한 이 정서를 이해하는데 2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도시에서 귀농하시는 분들의 가장 큰 난관중의 하나가 바로 이 농촌정서 부분일겁니다. 이기적,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갖고는 시골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지요. 공동체 사회라는 말, 시골에서 가장 실감하는 단어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볍씨와 흙을 담은 모판들을 논으로 날라서 한장한장 줄을 맞추어 놓는답니다. 예전에는 이 못자리 바닥으로 쓰이는 논을 물을 대고 삶아 질척하게 만들어 발목까지 빠지는 논에 들어가 모판을 나르면 힘도 들고 고생도 많았었는데 어느해부터인가, 남편은 모판이 놓일 곳들만 살짝 갈아서 부드럽게 만들고 큰 비닐 하우스를 짓지 않고 작은 비닐 하우스를 만들어 못자리의 작업을 수월하게 하였는데 다들 신기해 하셨지요.
되나 안되나 신기하게 여기며 지켜보시던 마을어르신들이 모가 잘 자라는걸 보시더니 이젠 아직까지도 힘들게 예전 농법을 고수하는 분들한테 제남편처럼 하라고 성화를 부리시네요. 비록 날 때부터 농부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가끔 남편이 농사짓는 방법을 보고 동네 어르신들이 감탄하고 배울때가 있어서 저도 신기할 때가 많습니다.
모판을 하나하나 놓은 후, 이번에는 보온 효과를 주기 위해 부직포를 덮고, 다시 그 위를 비닐을 덮어줍니다. 일정한 온도와 습기를 맞춰주면 조금 싹이 텄던 볍씨가 완전히 싹이 터서 뿌리를 내리게 되고, 논에 나가기 전이 될 무렵이면 잔디처럼 푸르른 모로 자라게 되는거지요.
이 과정을 바로 못자리라 한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못자리를 한 후에도, 햇볕에 타지않게, 병 들지 않게, 너무 자라거나 덜 자라지 않도록 매일매일 물을 대었다가 뗐다가, 비닐을 덮었다가 벗겼다가 관리를 해 줘야 하는데, 그 과정도 만만치 않지요. 어린 모가 자라 논에 나가기 전까지 못자리 관리하는 동안에는 집을 비울 수가 없답니다. 작년서부터 부쩍 외출이 많아진 남편인데, 조금 걱정되긴 하네요.
오전에는 그토록 거칠게 불던 바람이 오후가 되면서 조금 잦아졌습니다. 그래도 봄바람 치고는 좀 세찬 바람이라 바람에 펄럭이는 비닐을 잡고 고정시켜 삽을 들고 돌아가며 덮어주어야 하는데, 남편이 안전행정부에서 손님이 오셨다고 가버리는 바람에 제가 그 일을 대신했지요.
근데 사실 저도 삽질은 몇 번 해보지 않아 잘 모르는데, 땅을 팔 때 몸의 힘을 발에 실어 깊게 파고, 흙을 뜨는 순간에 비닐을 덮기위해 비워버리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구요. 제가 능숙하게 삽질하니깐 같이 일하시던 임장로님, 삽질을 쉽게쉽게 잘 한다고 칭찬해 주시네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나요, 그순간 저도모르게 으쓱, 제 삽질이 탄력을 받아 못자리 주변을 뺑뺑 돌아가며 열심히 열심히 비닐을 덮었습니다.
나중에 남편에게 의기양양하게 자랑했더니 제 남편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습니다. 그순간 살짝 불길한 느낌이......
이거 혹 삽질 하는거 몽땅 다 제 보직으로 바뀌는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 혹 임장로님 꾀에 넘어가서 멋모르고 신나게 삽질해댄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살짝 들기도 하네요.^^;;
저녁에 자려고 누웠는데 온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고......제가 아프다고 했더니 제 남편 가소롭다는 듯
"고작 하루 하고???"
하더니 한게 뭐 있다고 하는데 그순간, 갑자기 열이 확 받칩니다.
하긴 며칠전부터 남의 집으로 품앗이를 다닌 남편에 비하면 제가 한 모자리는 별것 아니겠지요. 그저 쉴새없이 돌아가는 기계에 허리 펴볼새 없이 상자를 공급하고,모상자를 나르고, 볍씨 옮겨담고, 부직포 씌워 모판 덮어 묻고,비닐 펴서 덮어 묻고 참참이 새참에 음료와 차 준비하고, 낫가져와라 삽빌려와라 이런저런 심부름에, 뒷정리까지, 정말 별로 한(!)게 없네요.ㅡㅡ;;
(요번 식사는 식당에서 해결 하는 바람에 그나마 일손덜었습니다.)
어쨌든 살짝 서운한 맘이 듭니다. 그래도 저는 피곤하다는 남편,저녁에 맛사지도 해주고 간식도 챙겨주고 이런저런 심부름 싫다않고 다 해주었는데...,,,
내년에는 당신 혼자 다해! 이래버릴까 싶은 심술도 슬며시듭니다.
( 제가 은근 뒷끝 있거든요. 우리 막내아들 표현에 따르면 뒷끝 작렬이라나요. ㅋ)
뭐 어쨌든 벼르고 벼르던 못자리를 마치고 나니 온 몸은 쑤시고 아파도 마음은 시원합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되 봄같지 않게 눈 내리고 추운 날들이 계속되는 지금
그래도 작년 가을 떠나갔던 제비가 새끼들을 몽땅 데리고 돌아와서 집을 여러바퀴 뱅뱅 돌며 인사를 건네는 걸 보니, 봄이 맞나봅니다.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이 돌아와서 어린 모들이 쑥쑥 잘 자라기를 기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