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마을 이야기

파주 헤이리 마을에서

삼생아짐 2012. 12. 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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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 불여일견...

 

열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눈으로 보는 것이 낫다지요?

 

마을 안에서 회의를 하고, 계획을 세우고, 이런저런 부대낌으로

 

우물안 개구리처럼 아웅다웅 살아가다가

 

다른 마을은 어떻게 마을살림을 꾸리고

 

어떻게 마을 발전을 계획하고

 

또 어떻게 체험객들을 끌어들이는지

 

 

외부 전문가를 초청하여 강의를 듣기도 하고

 

또 떠나기도 합니다.

 

 

늘 우리랑 비슷한 환경의 농촌마을들만 견학하다가

 

이번에는 도시 부근으로 떠났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살펴 볼 수 있는 곳

 

그리고 도시지역 마을들의 마케팅 방법과 홍보를 배우기위해서였지요.

 

 

첫번째 도착지는 파주에 있는 예술인촌

 

헤이리마을입니다.

 

파주 헤이리마을은 1995년부터 건축가, 미술인, 음악가, 작가 등 380여명의 예술인들이

 

약 15만평의 넓은 대지에 하나, 둘씩 모여들어

 

작업실,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 공연장 등을 짓고

 

하나의 촌(마을공동체)를 형성하여 운영되고 있는 곳이지요.

 

 

제주도에 조성되어 있는 '선녀와 나무꾼'처럼 우리의 과거로 떠나는 여행

 

총 3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근 현대사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을에도 70년대 지어진 집들이 고스란히 살아있어

 

자문교수님 한 분이 추억의 거리로 조성해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주셨던 적이 있어

 

더욱 관심이 가는 곳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어린시절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어 참 많은 공감이 가는 곳이었지요.

 

 

60~70년대 집들의 모습

 

가난하고 어렵지만 온 가족이 모여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들

 

 

이미자, 남진,백설희, 은방울자매 등의 노래가 늘 흘러나오던 전파상이죠,

 

일곱살때 아버지께서 월부로 구입하시고

 

애지중지 하셨던 라디오와 전축을

 

겁도 없이 오빠랑 자석 꺼낸다고 모조리 뜯었다가

 

원상복구하지 못해 종아리 맞았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섣달그믐이면 골목 어귀부터 들려오던 복조리, 짚신 팔던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들

 

어머니께서는 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새로운 복조리를 꼭 한쌍씩 구입하시고

 

거실 한 구석에 걸어놓곤 하셨었지요.

 

고 조그마한 복조리에라도 온 가족을 위한 복이 가득 담기기를 기원하셨던

 

소박한 어머니의 기복신앙이 고스란히 생각납니다.

 

 

아버지의 새벽 운동을 따라 갔다가

 

아버지의 단골다방에서 쌍화차에 따라나온

 

덤으로 얻어 먹던 달걀지짐에 끼얹었던 참기름의 고소한 향기  

 

다방아줌마가 너네 작은엄마라고 웃으며 말씀하셔서

 

집에 가서

 

엄마한테 일러야하나 말아야하나 어린나이에 무척이나 고민했었던 기억

 

그러면서 엄마에게 화장도 하고 이쁜 옷도 입으라고

 

졸랐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어린 나이에도 아빠를 빼앗길까봐 무척이나 겁을 먹었던 모양입니다.

 

 

처음 농촌으로 시집오자마자 남편을 따라 양은주전자 하나 들고

 

별을 헤아리며

 

막걸리를 받으러갔다 오던 주막집의 추억

 

그때 남편은 저더러 평생을 연애하는 것처럼 살자고 새끼 손가락 내밀며

 

약속을 걸었었지요.  

 

평생을 연애하는 것처럼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힘들때면 가끔 그 밤에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보았던 수많은 별들이 생각납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보물창고

 

이 오래된 궤짝안에는 없는게 없었지요.

 

쪽찐 머리를 단정하게 마무리해주던 피마자기름이며,

 

머리카락을 모아 넣어 만든 바늘꽂이

 

개나리 색 한복치마

 

색동 돈주머니

 

정월 초하루면 온가족이 모여 놀곤했던 윷점꾸러미며

 

주사위가 들어있던 놀이주머니까지

 

할머니의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던 소지품들이 모두 저런 궤짝속에 숨어있었지요.

 

저 궤짝은 열었을 땐 보물창고지만

 

닫았을 땐 할머니의 화장대가 되곤 했었지요.

 

 

아주 어릴적, 엄마 손 잡고 따라 갔던 점집의 굿당

 

종가집 종부로서 집안 대소사의 온갖 살림을 꾸리시던 어머님은

 

저희 4남매를 키우시면서 어렵고 힘들때면 드물게나마 이런 곳을 찾곤 하셨지요.

 

어린 제 귀에도 점쟁이의 대답이야 늘 뻔하게 느껴졌지만

 

이곳을 돌아나오는 어머니는 점쟁이가 써준 작은 부적 하나 소중하게 챙기시면서

 

그만큼의 희망이 깃든 밝은 얼굴로 나와

 

또 힘차게 살아갈 힘을 얻곤 하셨지요.   

 

 

잔솔가지 태우는 냄새가 매캐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지던 재래식 부엌

 

따뜻한 불길이 퍼지면서

 

밥익는 냄새와 더불어

 

시린 저녁 한기가 사라지고 따뜻한 온기가 살아나던 시골집의 부엌

 

저도 처음 시집와서 이렇게 가마솥에 불을 때며 살았었는데

 

열심히 가르쳐 놓았더니

 

농사꾼에게시집간다고 무척 서운해 하셨던  친정어머니,

 

 저희 집에 다니러 오셨다가 이런 풍경을 보고 혀를 끌끌 차셨었지요.

 

그래도 전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을 해서 가마솥 가득 물을 채우고

 

목욕탕이 없어 부엌 한쪽에서 뜨거운 물로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

 

장작땐 따끈한 방에서 남편 팔베개를 하고 도란도란 화로에 군고구마 구워가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신혼시절이 지금은 그립습니다.   

 

그때는 무척이나 어설프고 고생스런 시간들이었지만

 

지금은 소중한 추억의 시간이 되었네요.

 

 

리어카 판에 엿을 들고 다니면서 고물과 바꿔 주셨던 엿장사아저씨

 

구멍난 양은냄비, 헌책, 헌 병, 헌 옷까지도 받아가셨었지요.

 

고물의 양에 비해 아저씨가 잘라주는 엿의 길이는 형편없이 작았지만

 

그 엿의 달콤함은 세상 어느것도 따라갈 수 없었지요.

 

 

저녁이면 엄마와 함께 이부자리에 풀을 먹이시고

 

뜨개질, 바느질을 하시며 고초당초보다 매운 시집살이 이야기를

 

하고 또 하시던 할머니

 

 

구멍난 바지의 무릎 부분에 천을 덧대어 박음질을 하던 재봉틀

 

때로는 엄마가 포목점에서 끊어온 천으로

 

이불 호청을 만들고 난 후

 

면 원피스를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래서 이불호청과 제 옷이 똑같은 무늬가 된 적도 많았지요.

 

 

씽크대가 설치된 입식 부엌으로 만들기전

 

양은곤로와 함께 부엌 한 면을 차지했던 찬장

 

저 서랍속에는 십원짜리 동전이 항상 놓여 있었고

 

그 동전으로 두부를 사오고, 콩나물을 사왔었지요. 

 

 

좀 창피한 일이지만

 

초등학교때부터 대학교 졸업때까지

 

전 동네 만화가게의 큰 고객이었답니다.

 

어렸을때 만화가게에 파묻혀있다 보면

 

어두워지는 것도 몰라 저녁밥먹을 시간까지도 집에 들어가지 않아

 

저를 찾으러 오빠랑 동생이 오기도 했었지요.

 

대학교 때에도 이 만화가게에 갔다하면 떠날 줄을 몰라

 

엄마에게 엄청 혼났었지요.

 

그래서 유난히 만화를 좋아하는 막내아들녀석이 만화책을 사달라고 하면

 

저는 생활비가 쪼들릴 때에도 군말없이 사주곤 합니다.   

 

 

추억의 학습백과사전, 주판

 

 초등학교때 주산을 배우면 머리가 좋아지고

 

계산력이 좋아진다고 해서

 

주산학원 열풍이 불었었는데

 

경시대회도 있었지요.

 

암산 시험에서 틀리면

 

학원 선생님이 저 주판으로 머리를 드르륵 긁으면 얼마나 아팠던지...

 

덕분에 암산력은 참 좋아졌었지요.

 

지금은 계산기도 필요없이

 

컴퓨터의 액셀로 처리하면 훨씬 간편한데

 

예전에는 저 주산이 장사하는 곳에서는 참 요긴하게 쓰였었지요. 

 

 

난로를 피우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양은도시락

 

김치를 깔고 들기름을 두르고 달걀지짐 하나 얹어

 

데워먹던 점심시간들

 

 

보온도시락이 있었어도

 

보온도시락보다 저 양은 도시락에 데워먹던 김치볶음밥의 맛은 잊을 수가 없네요.

 

혹시나 내 도시락이 너무 밑에 있어 타지 않을까

 

혹은 너무 위에 있어 덜 데워지지 않을까

 

도시락 데우는 담당이 있어

 

수업시간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위아래로 바꿔 놓을 때면

 

선생님의 수업내용은 저만치 달아나버리곤 했지요. 

 

 

졸업장을 담던 통, 기념 깃발

 

 

대학교때 배웠던 타자기...

 

상고학생들의 필수 과목이었지만

 

저도 사실 저 타자기를 갖고 대학교 졸업논문을 제출했었지요.

 

일부러 타자학원을 다니기도 했어요.

 

지금이야 컴퓨터와 프린터가 대신 하는 워드작업이지만

 

예전에는 손으로 하나하나 쓰는 것보다 타자를 이용해서 문서를 작성하면

 

몇 배나 빨랐었지요.

 

게다가 교수님도 타자로 작성해낸 레포트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곤 하셨었지요.

 

 

무엇이든 모우고

 

무엇이든 소중하게 느껴지던 사춘기 시절들

 

아름다운 나뭇잎 하나도 그저 지나치질 않았고

 

인생의 지표가 되는 성현들의 좋은 이야기들

 

서양 철학자의 멋진 이야기들

 

이쁜 낙엽을 모아 옮겨적기도 하고

 

가슴 저리게 좋은 시 한 귀절은 밤을 새워 외우곤 했었지요.

 

 

문을 닫아걸고 하염없이 듣곤 했던 LP판들

 

새로 장만할 때면 얼마나 좋았던지

 

그러다가 테이프로 바뀌고, CD로 바뀌고 MP3, MP4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늘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는 음악들...

 

 

한때 우표모으기의 열풍이 불어

 

새로 기념 우표가 나올 때마다 우체국 앞에 가서

 

새벽부터 문 열리기를 기다렸던 시간들

 

나비시리즈, 태극기 시리즈, 운동경기 시리즈

 

그 때 모았던 우표들은 지금도 소중한 재산으로 남아있습니다.

 

 

현금이 부족한 시절

 

동네 구멍가게에 외상을 달고 조금씩 사서 먹던 부식거리들

 

이 외상 장부의 돈을 갚을 때면

 

가게 주인 아저씨는 엄마에게 아이들 주라고 조그만 캬라멜도 주시곤 하셨었지요.

 

 

기름보일러가 나오기 전

 

집집마다 땠던 연탄들

 

흐리고 기압이 낮은 날이면 연탄가스가 낮게 깔려

 

온 가족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을 뻔 하기도 했었던 기억들

 

다행히 일찍 일어나시는 엄마 덕분에 동치미를 마시고

 

무사했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연탄가스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참 많았었지요. 

 

동치미가 연탄가스에 좋은 지 어떤 지는 몰랐지만

 

엄마는 겨울이면 꼭 동치미를 담그셨지요.

 

 

외국인 친구와 꾸준하게 주고 받았던 펜팔

 

영어 실력 늘린다고 사전 뒤져가며 참 많이 밤새웠지요.

 

 

저는 초등학교때 이 밀가루 보다는

 

초등학교 교사셨던 삼촌이 월급의 일부로 받아오신

 

분유를 끓여 과자처럼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간식이 부족하던 시절

 

네모난 깡통에 담긴 각설탕 하나로도 행복했던 시간들

 

 

골목을 통틀어 단 한 대뿐이었던 텔레비젼

 

온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여 연속극을 보며 울고 웃던 시간들

 

 

둘만 낳아 잘 길러야 하는 시대에

 

4남매나 되었던 우리 집은 학교에서 가족조사를 할 때면

 

어쩐지 부끄럽고 창피했었지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이 많아

 

이사 다니실 때마다 눈치를 보며 세 들어갈 집을 구하시는데 고생하셨지만

 

단 한 번도 저희들에게 어려운 내색을 않으시고

 

늘 형제들간에 우애를 강조하셨었지요.

 

 

신문고처럼 억울한 일이 있을 때면

 

내용을 적어 넣게 했던 위민함

 

 

전국 노래자랑 때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짓는

 

실로폰을 한 번 쳐보며

 

추억 여행을 마쳤습니다.

 

 

두번째로 들른 곳은 트릭아트 박물관

 

 

벽 전체가 도화지역할을 하는 곳이죠.

 

마을의 삭막한 벽이나 체험공간등에 벽화를 많이 그려넣는데

 

한국적인 소재로 바꾸어

 

이런 트릭아트 작품을 꾸미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한도형 두동물 모양의 조각작품들은 일본에서도 본 기억이 있는데

 

체험 아이템으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퍼즐 파블리온에도 들러보았지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조각작품도 있고

 

입체 퍼즐, 퍼즐로 재현한 영화 포스터,각종 명화 등

 

각종 퍼즐들이 눈길을 잡아끕니다. 

 

마을 홍보물도 이렇게 퍼즐로 만들면 어떨까...싶은 생각도 들고

 

이런 공간들이 헤이리 마을에 많은 방문객들을 불러 들이는 요소가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기로 운행하는 이동자전거

 

 

마을에 체험객들이 왔을 때

 

트랙터나 경운기, 트럭 등을 타고 이동하는데

 

이런 무공해 전기 자동차 등을 이동수단으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시간상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해서 더 많은 곳을 보진 못했지만

 

아무도 없던 빈 들판에

 

저마다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낸 새로운 마을

 

마을 자원이 없다고 고민만 할 게 아니라

 

인적 자원을 더 많이 조사해서

 

이렇게 사람들이 찾아오는 마을로 만드는 것도

 

색다른 발상이 될 듯 싶습니다.

 

 

저녁에는 전문가를 초청하여

 

체험관광에 관한 노하우와 우리 마을 알기

 

그리고 마을 발전방향 등에 관해 공부하고 토론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사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점차 변해가는 마을의 모습을 보고

 

변해가는 주민의식 등을 느낍니다.

 

 

때로는 농촌마을 사업이 넓은 바다 한가운데

 

작은 돌을 던져 탑을 쌓는 듯한 막막한 기분도 들었지만

 

이런 선진지 견학을 통해 다른 마을의 발전 형태도 보고

 

많은 토론과 회의 등을 통해 우리 마을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발전 방향을 모색해가고

 

끝없는 주민 교육 등을 통해 사업의 진정한 목표를 이해해 가는 시간들을 가짐으로써

 

진정한 농촌마을 상을 확립해 가는 듯합니다.

 

 

고인 물은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속적인 노력과 변화, 그리고 옛것을 돌아보고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깨어있는 의식이

 

건강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든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