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국외)

주는 대로 먹어

삼생아짐 2009. 6. 2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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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는 대로 먹어


일본에서의 첫 아침, 찌뿌드한 몸을 이끌고 내려와 식당으로 향하니 역시 우리가 일등.

집 떠난 여행의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식사준비 걱정 없는 것.

차려진 아침상을 보고 또 한 번 기절할 뻔했다.

 

철저한 개인주의, 일인(一人) 문화.

십 육 등분 된 김 세 조각, 훈제 고등어 사분의 일 토막. 차가운 달걀말이 한 조각. 된장국. 앞앞이 놓인 조그만 쟁반이 다른 문화를 여실히 느끼게 해 준다.

“주는 대로 먹어.”

우리 집 가훈이다. 감히 먹을 엄두도 못 내고 온기 하나 없이 싸늘한 밥상을 멍청히 들여다보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씨익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원래 우리 집에서의 반찬 투정은 통하지 않는다. ‘주는 대로 먹거나, 먹기 싫으면 굶거나’이다. 내가 뱉은 말이 어느새 가훈이 되어 우리 아이들은 반찬 투정이란 걸 모른다. 때로 내가 너무 바빠서 김치 한 가지만 놓아도 아이들은 고추장에 비벼서 잘도 먹는다. 아니, 차려주지 않아도 저희들끼리 잘도 찾아 먹고 설거지도 척척 해 놓는다. 은근한 자부심이었는데, 일본에 와서 내가 이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막내 녀석이 학교에서 가훈을 써오랬다면서

 

“엄마, 우리 가훈은 ‘주는대로 먹어’지요?”

해서 “응” 그랬더니 선생님이 다시 써오라 그랬단다.

“엄마, 그거 우리끼리 있을 때만 가훈하고 딴 거 쓰면 안될까요? ‘열심히 살자’, 같은 거요.”

“안 돼, 맘대로 바꾸면 그게 무슨 가훈이야? 지켜야 가훈이지.”

그랬었는데......

그래서 결국 우리 가훈은 우리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가훈이 되어 버렸다.

여전히 젓가락으로 깨작거리고 있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세 공기씩 후딱 먹어치운다.

 

“맛있어?”

“응, 땀도 안 나고.”

 

그럴 밖에. 도대체 매운 기가 있어야 말이지. 매운 거 싫어하던 나였는데 쌤통 되어 버렸다. 평소에 남편이 끓여 달라던 고추장 푼 칼국수며, 얼큰한 두부찌개며, 매운 탕 등 매운 거는 질색이었는데 청량 고추 들어간 부글부글 끓는 김치찌개가 너무 그립다.


식후에 잠시 짬이 있어 일찌감치 짐을 꾸려두고 민숙 주변을 돌아보았다. 민숙 바로 위에 커다란 절이 하나 있다.

들은 풍월이 있어서 혹 법륭사? 금당벽화? 했더니 통역사가 씨익 웃는다.

그 절은 아니지만 꽤 유명한 절이라고.

 

어쩐지 민숙 홀에 사탕이나 과자 등이 많더라니. 전형적인 사하촌(寺下寸)이었다. 절에 오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밥도 해주고 잠도 재워주며 먹고 사는 마을이었다.

절과 마주해서 입구에 신사가 있다. 호기심에 들여다볼까 했더니 신사를 방문하는 것 자체가 신사참배라고. 일본인들은 아이를 낳아도 신사에 참배하고, 결혼을 해도, 장례를 치러도 모든 것을 신사에 참배하는 것으로 통과의례를 치른다. 불교신자나 기독교 신자처럼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신도라는 교라고까지 한단다. 어쩐지 어제 저녁 동네 들어설 때 입구에 양쪽으로 늘어선 대나무에 뻘건 깃발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더라니.

절 아래 활짝 핀 빨간 꽃이 계절을 잊어버린 듯 하다.

 

“저거 매조아냐? 왜 화투장에 2월 매조 있잖아.”

“아이고, 좀 무식한 티 좀 내지 말아.”

“그럼 뭔데?”

“빨간 꽃.”

“응?”

타박하는 남편이나 꽃에 무심한 나나 무식하기는 오십보백보다.

보다못한 아랫마을 위원장 어르신이 한마디 내 뱉는다.

“동백이요.”

“아, 그 동백. 선운사 동백.”

 

우리 부부 뒤를 천천히 따라오던 다른 마을 위원장님들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그럴 밖에. 춥디 추운 강원도 산골짜기에 살다보니 남쪽 마을에나 피는 동백을 본 적이 있어야지. 맨날 말로만 듣던 동백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다른 마을들도 좀 다니고 그래야겠다. 여름철엔 농사일에 매이고 겨울철엔 소 때문에 둘이 같이 여행다니기가 어렵다. 한 사람은 남아서 집을 지켜야 하니까.

되잖은 오기. 무식한 티냈으니 한 번 쯤 상쇄하고 싶다.

 

“설피 신어 본 적 있어요?”

 

눈 구경 제대로 못하는 남쪽 지방에서 설피를 보았을리도 없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하는 김에 한마디 더.

“트랙터 눈썰매도 재밌는데.....”

남편이 머리에 꿀밤 먹인다. 입 다물자.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좋아하는 시는 죽자고 외우면서 왜 동백꽃은 실물 한 번 못 보았을꼬. 사진으로라도 봐둘걸.

 

이미 무식이야 떨은 걸. 화투장 안 가져오길 잘했지. 여성 농민운동 하던 박화경 선배가 떠오른다. 사내처럼 걸걸한 목소리에, 손가락 깨물어 혈서까지 써 가며 농민운동에 앞장서던 언니.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 된 언니가 그랬었다.

 

‘일본 쪽바리놈들 조선사람 망가뜨리려고 화투장 가르쳐 준건데 그거 붙잡고 앉아 겨울철에 일도 안 하는 시골 남정네들 보면 징글징글해.’

 

오빠랑 동생들이랑 사남매가 모여 앉아 용돈 받은 날이면 그 용돈 불려 보려고 오목에 바둑에 장기에 카드에 하다못해 민화투까지 쳤었다. 그러다 엄마에게 들켜 반성문까지 썼지만 오락에, 잡기에, 내기 좋아하는 습성은 아직까지 남아 가끔 컴퓨터로 고스톱을 치곤 한다. 아무도 모르게......

 

실은 3일밤 연속으로 꼴딱 새운 적도 있다. 나중엔 고스톱으로 논문을 써도 될 지경이었다. 시간대별로 들어오는 사람 연령에, 직업에, 성격까지 파악하고 있었으니... 하긴 처음에 주민들 컴퓨터 교육할 때 그 자금이 요긴하게 쓰이기 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내가 왜 이 나이에 컴퓨터 배워야 혀?’ 하시길래 ‘치매에 좋대요.’ 했더니 열심히 배우시고 돈 떨어지면 팍팍 밀어드렸더니 교육도 열심히 나오셨다. 나중엔 돋보기 들고 이메일 보내는 법까지 무난히 다 배우셔서 손주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하셨었다. 짐 꾸리면서 ‘화투 가져갈까’ 했더니 남편이 펄펄 뛰었다.

 

“이 사람이 지금 놀러가는 줄 알아?”

“아니, 잠 안 오면 치려고......”

신혼 초에 친정 집 그리워서 훌쩍훌쩍 우니까 고스톱 치자고 꼬셔서 밤마다 내 쌈지돈 다 뺏어간 게 누군데...... 놀아주는 척하고.

어쨌든 화투 대신에 굵직한 수첩하고 볼펜 세 자루 챙겨왔다.

공부 준비 끝.

 



       

           호텔에서나 민숙에서나 거의 공통인 아침메뉴

           국물있는 한국의 식사는 인정의 나눔인데...